도올 김용옥 서양철학사 40강
THESE :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 삼단논법(Syllogism)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분류 : 내가 논리학을 강의할 게재가 아닌데 철학사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강의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Organon(방법론적 원칙)에서 철학을 이론 철학(theoretical), 실존철학(practical), 시학(poetic)으로 분류했다. 이론 철학(theoretical)에는 수학(mathematics), 물리학(physics), 형이상학(metaphysics), 실존철학(practical)에는 윤리학(ethics), 정치학(politics), 시학(poetic)에는 미술(art), 시학(poetry), 희곡(drama)으로 세분했다. 그러나 논리학(logic)은 철학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논리학이란 것은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예비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으로 봤다. 논리학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사고의 방법, 진리(truth)라는 것은 "the agreement of knowledge with reality" 인간의 지식이 진리와 부합하느냐? 부합하지 않느냐의 문제로 부합하면 진리(truth), 부합하지 않으면 오류(error, fault)가 된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정신적 표상(mental representation)으로 이데아가 객관적 사물과 상응하느냐 하는 것으로 결국 논리학(logic)이란 사고의 바른 추론(correct inference)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라는 게 알고보면 결국 삼단논법(syllogism)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대전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다. [소전제] 고로 아리스토텔레스도 죽는다. [결론]" 이런 논리를 연역법이라고 한다. 연역이란 추론의 과정이지 새로운 사실을 첨가하진 않았다. 이런 것이 연역이다. 인간의 어떤 언어의 형식을 말했다는 것 자체가 획기적 사건이다.
러셀의 삼단논법 비판 : 더군다나 희랍문명이 건강하게 숙고(debate)할 시기에 이 작품이 쓰였으면 인류사에 기여를 했을 것인데 불행하게도 희랍 문명이 쇠퇴해가는 막판에 이런 걸작이 나오는 바람에 이천 년동안 인류를 구속하는 권위로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희랍 문명이 사라져 가는 시점에 나타나, 제대로 숙고하지 못한 채 절대적 권위가 된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적 정의가 모든 종교적 논쟁(argument)에 쓰였다. 결국 서구 문명은 이런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삼단논법에서 대전제는 자명한 것(self-evidence)이다. 이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삼단논법(syllogism)은 정확하게 입증된다. 러셀은 이 대전제인 "모든 사람은 죽는다"가 명제일 수 없다고 했다. 150년동안 살아있는 사람이 없다.라는 것은 말이 될 수 있어도,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수학적 명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은 대전제 자체가 문제가 있다. 우선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확인이 된 사항이 아니다. 무두셀라(969세 사망)처럼 800년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모른다. 최근에 "Man from earth"라는 영화까지 나와있지만 주인공은 몇천 년을 살았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죽는다. 는 것이 Self-evidenc 한 것도 아니고, 대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이하의 추론은 무의미한 게 된다. 어떤 형식논리를 떠나서 내용적으로 이걸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대명제를 만들어내는 우리의 합의 과정은 연역이 아니라 귀납(歸納)에 의한 것이다. 연역법(演繹法)에서도 귀납이란 범주를 제외시킬 수 없다. 귀납적 방법에 의해 대전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러셀의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비판 : 귀납법엔 새로운 사실이 첨가될 수 있다.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사실이 첨가될 수 있다. 예를들면 생물학적 발견은 귀납적이다. 연역법(syllogism)이라는 게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다. 과대평가된 부분이 있다. 수학이 4천 원짜리 물건을 살려면 5만 원 지폐를 내면 얼마의 거스름돈을 받아야 하나? 수학 이안 이런 것인데 이건 삼단논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삼단논법 화 하면 웃긴다는 얘기다. 수학적 추론은 삼단논법이 아니다. 그런데 마치 삼단논법이 모든 논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오류를 범했다. 그리고 연역법에 대한 과대한 평가도 문제다. 연역법과 귀납법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삼단논법 자체가 엉터리다. 나는 이번 장에서 관심을 가졌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삼단논법을 제외하면 전부 거짓이라고 결론짓는다. 오늘날 논리학을 배우고 싶어 하는 이가 아리스토텔레스나 그의 제자의 저술을 읽게 되면 시간을 허비하는 셈이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술은 대단한 기량을 보여주며 지성인의 독창적인 연구가 여전히 활발하던 시기에 세상에 나왔더라면 인류에게 유익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의 저술들은 그리스 사상에 창조적 시기가 끝날 무렵에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권위 있는 학설로 수용되고 말았다. 논리학 분야에서 독창적인 연구가 부활될 때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이천 년동안 군림하게 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권좌에서 몰아내는 일은 대단히 어려워졌다. 사실 근대 전반에 걸쳐 과학, 논리학, 철학 분야는 모두 아리스토텔레스 제자들의 반대에 맞서는 과정을 거쳐 진보했다. 결론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은 공부할 필요가 없다.
모순율(the principle of contradiction) : 하나의 명제가 동시에 참이거나 거짓일 수 없다. 배중율(the principle of the excluded middle) : 하나의 명제는 반드시 참이거나 거짓이어야 한다. 이것을 대 전제로 삼는 게 알파고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이 저차원적인 게 서양인들은 이것 때문에 논리가 협의(狹義)해졌고 과학이 발전했다. 동양에서는 이를테면 그 여자는 이쁘고 이쁘지 않다.라는 말이 쓰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서양 언어에서는 그게 안 된다. "she is beautiful, not beautiful."이란 말이 구문론(syntax)상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 언어와는 차이가 난다. 서구 논리학이 우리에겐 해당이 될 수 없다.
범주(category)의 정의 :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범주(category)라는 말인데 어렵다. 러셀 역시 범주라는 말을 잘 모르겠다고 한다. 나는 범주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아리스토텔레스에서든 칸트나 헤겔에게서 한 번도 이해한적이 없었다. 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러셀 말에 공감한다. 칸트의 12 범주라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온 건데 나는 그의 주장에 회의감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 된다. 나로서는 범주라는 용어가 철학을 할 때 명료한 관념을 표상하는 용어로써 어떤 식으로든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범주에 대해서 유일하게 내린 정의는 어떤 식으로든 혼합되지 않는 표현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유니크하게 어떤 경우로도 혼동되지 않는 열 가지 범주가 있다. 1. 실체(substance), 2. 양(quantity), 3. 성질, 질(quality), 4. 관계(relation), 5. 장소(location), 6. 시간(time), 7. 상황(position), 8. 양태(state), 9. 능동(active), 10. 수동(passive)
카테고리라는 게 서로 혼동될 수 없는 요소들이다. 논리학에서 어떤 문장을 구성하는 어떠한 사유에 10가지 범주가 있다. 이것을 가지고 후에 칸트가 인식론으로 발전시키는데 그 시작점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는 걸 알아야 한다. 러셀만 해도 훌륭한 것이 실체(substance)라는 것이, 전부 허구라는 건데 유례없이(unique) 존재하냐 하면, 실체라는 건 어디까지나 주부와 술부에 있어서 언어의 주어 위치에 오는 것에 대한 착각(錯覺)이다. 실체가 있다고 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대 오류다. 프랑스어에는 없다. 무슨 말인지 모른다. 실체가 없는 걸 실체화 했다. 서구적 언어, 주어적 방편의 세계, 논리적인 방편의 세계를 항상 실체화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에 끼친 최대의 악영향이다. 실체 개념은 본질 개념처럼 언어상의 편의에 지나지 않는 것을 형이상학에 옮겨놓은 결과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유명한 개념이 본질(essence)과 사건(accident)이다. 사람은 사지가 있다. 전쟁터에 나가서 팔 하나를 잃는다고 해도 그 사람의 본질(essence)은 변하질 않는다. 그런 우발적인 사건이 아닌 주어의 아이덴티티(identity)가 유지되는 것. 그걸 본질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건강하다 감기에 걸려 아플 수 있지만 소크라테스란 본질이 변한 게 아니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 인간이 속하는 종을 찾고, 종차(種差)에 의해서 본질이 규정된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여기서 인간이 동물이란 속성(generics)에 속하지만 개와 다른 점은 인간은 이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럴 때 이성이라는 게 인간의 본질(essence)이 된다. 만약 이성이 없어지면 인간이 아닌 게 된다. 본질의 개념이란 게 이런 의미다. 이게 서구 이천 년을 지배해왔던 중요한 사상이다. "네 본질이 뭐냐? 내가 알 게 뭐냐?" 그러나 서양에선 그걸 따졌다. 사르트르 때 와서야 "인간의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발이다. 얼어빠질 내게 무슨 본질이냐?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나지. 내가 변하지 않는 한 유지될 수 밖에 없는 것. 그 사물의 속성들 가운데서 동일성을 잃지 않고서는 바뀔 수 없는 속성. 소크라테스의 본질은 인간이라는 속성이다. 뭔가 언어상의 편의에 지나지 않는 것을 형이상학에 옮겨놓은 결과물이다. 이러한 허구가 서양사의 이천 년을 지배해왔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엔 몇 개의 주요 개념이 제기됐고, 삼단논법이 제기되었으나 오늘 날에 유용한 점을 발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