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강의

도올 김용옥 서양철학사 31강

해암 송구호 2021. 12. 14. 13:42

THESE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동방 철학과 희랍철학의 차이점 : 희랍철학은 사변 철학(Speculative philosophy)이다. 기본적으로 책사들의 철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방 안에서 자기들의 사고를 체계적으로 써놓은 것이다. 그러나 동방 철학은 사변 철학(Speculative philosophy)이 아니라 실용철학(practical philosophy)이다. 다시 말해 무사들을 설득하는 설득 철학(persuasion philosophy)이었다. 설득이란 게 당장(當場)에서 설득하는 것이지 이론(理論)의 설득이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군령을 바꾸고, 전술 형태를 바꾸는 것으로 설득할 때 순수 논리가 아니라 근거(根據)를 대야했다. 과거에 있었던 출전(出典)을 대고, 우화(allegory)는 반드시 들어가야 했다. 그래야 권위가 생겨나고 그 후엔 논리적인 호소가 아니라, 감정적인 호소를 해야 하는 것이다. 동방 철학은 논리의 싸움이 아니라 감정적 호소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사마천의 열전" 그것이 바로 동방 철학이다. 동방 철학을 묻는다면 사마천의 열전을 소개하면 된다. 이게 바로 철학적 인간학(philosophy anthropology)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상황에 부딪쳤을 때, 어떠한 결단을 내리느냐, 즉 결단(決斷)의 문제다. 여기서 전후 맥락(前後脈絡)을 누가 먼저 집어내느냐가 관건(關鍵)이 된다. 결국 사변 철학이 아닌 인간학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 사감에 치우치지 않고 역사에 대의를 지향했고 삼국지의 모든 영웅호걸들이 대의(大義)가 없는 영웅호걸들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 영웅호걸(英雄豪傑) 중 가장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일수록 민중의 사랑을 받는다. 그중 한 사람이 관우(關羽)다. 그를 관제(關帝)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손권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그의 목이 조조에게 보내졌다. 그 해에 조조도 죽는다. 관우의 죽음으로 조조가 죽을 뿐만 아니라 관우를 죽인 여몽도 죽는다. 그리고 여몽의 부관인 손가요마저 죽는다. 관우의 원혼 때문에 세 사람이 제명을 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중국의 민중들은 진정한 군주는 "관우"라고 해서 사후에 그의 이름을 관제라고 불렀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겠지만 관우의 원혼이 워낙 세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라고 믿어 민중들이 사방에 관제묘(關帝廟)를 만들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신설동에 동묘(東廟)가 바로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8세에 플라톤의 아카데미에 학생이 된다. 그는 그곳에서 20년 간 공부를 했다. 그리고나서 알렉산더 대제가 13세 되던 해에 가정교사가 된다. 알렉산더는 아테네 사람이 아니라 마케도니아 사람이었다. 스파르타나 아테네와는 다른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제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느냐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없다. 플라톤의 철학이 폴리스의 철학이라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알렉산더 대제가 살았던 코즈모폴리턴의 세계에 걸맞은 국제적인 철학이 아니냐? 이렇게 억지로 맞추는 사람도 있지만 별로 신빙성(信憑性)이 없다. 3년 후 알랙산더가 즉위한 뒤 마케도니아를 떠나서 리퀴움(Lyceum)이라는 학교를 세웠다. 그는 소요학파(Peripatetic) 또는 산보 학파라고 해서 회랑(回廊)을 걸으면서 제자들과 학문을 토론했다. 소요학파는 12년 간 운영됐는데 폭군인 헤르미 니아스를 찬양했다는 게 불경죄로 걸려서 재판에 회부(回附)됐는데 칼시스로 도망가서 63세까지 편안하게 살다가 위궤양으로 죽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료는 방대한데 플라톤과 달리 그에 관한 연구는 미흡한 편이다. 자료가 방대하고, 복잡한데 반해 실속이 없기 때문에 기피하고 있다. 또 플라톤을 깊이 연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하여 알 수 있기 때문에 따로 연구하려 않는 것도 한 원인이다. 따라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대립적으로 놓고 파악하는 것은 상당히 유치하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의 철학을 존재의 철학으로 말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생성의 철학으로 말하는데 그 주장엔 문제가 있다. 철학을 세 파트로 나눴다. 1) 이론 철학(theoretical) 2) 실용철학(practical) 3) 시학(poetics)이다. 이론 철학(theoretical)엔 수학(mathematics), 물리학(physics), 형이상학(metaphysic)이 있다. 형이상학은 물리학 다음에 오는 책이란 의미로 쓰인 것이다. 물리학 다음으로 물리적 질서의 고차원적인 문제를 다룬 것이 형이상학이 됐다. 그러나 서양에는 형이하학이 없다. 역경에 형이상자 위지도, 형이하자 위지기(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서양에선 이말이 무슨 뜻인지 조차 모른다. 이 사람은 논리학을 철학에 집어넣지 않았다.

 논리학은 철학을 하는 방법론의 기초로서 플라톤에게 있어서 기하학과 같은 어떤 방법론이지 철학의 본령은 아니라고 봤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논리학은 중요하고 이것은 삼단논법에 의한 연역법이 나왔다. 연역법과 귀납법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생겨난 말이다. 사람은 다 죽는다.(대전제),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도 죽는다. 대전제(self-evident)의 자명한 사실(truth)을 받아들일 때 명제가 참이 될 수 있다. 직선이란 두 점간의 최단거리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거기서 삼단논법이 생겨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대전제를 받아들일 때, 즉 필연적 추론(推論)을 받아들일 때에만 가능하고 만약 대전제에 부정이 내포될 경우엔 논리는 쉽게 무너진다. 이게 형식논리고 수학의 세계다. 수학이란 연역의 논리다. 그러나 귀납법은 경험적 불완전한 사실로부터 사실에 접근하는 논리로 의학, 생물학, 화학, 역사 등은 귀납추리의 산물이다. 역사란 판단이다. 역사가들이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선택하느냐! 사실은 같은 사실인데 사실을 어떻게 선택해서 어떠한 논리로 구성하느냐 하는 게 역사다. 역사라는 건 사실을 근거로 하되 사실을 어떠한 논리로 엮어내느냐 하는 문제로 그것을 엮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진핑에 관하여 조사를 해보면 중국 현대사에도 어김없이 삼국지가 재현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호금도(후진따오)를 보면 항상 온화한 미소를 띤다. 그런데 뭔가 서있는 폼이 쭈뼛쭈뼛한 것 같다. 시진핑을 보면 사람이 아둔한 것 같아도 자신이 있어 보인다. 호금도의 통치 10년 동안 강택민의 그늘을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군사위를 강택민이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사위 부주석에 시차우(서재후)를 앉힌다. 그리고 당과 국가를 장악하는 국가상무위원회 9인 중 한 명인 저우융캉(주영강)인데 저우융캉은 모든 당을 장악한 인물이었다. 호금도는 이 두 사람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공산당 건물엔 81이란 숫자가 붙어있다. 1927년 8월 1일에 공산당을 창당했기 때문에 81이란 숫자가 들어가면 공산당 건물이란 묵시적 의미가 담겨있다. 군과 당을 장악한 강택민은 호금도 보다 큰 집무실을 사용했고, 이 두 사람은 강택민에게 먼저 보고를 했다. 호금도는 정권을 내놓을 때까지 이인자였다. 호금도의 직계라인은 리커창이었다. 호금도는 공청단(공산청년단) 최고직을 맡았고 리커창도 거기 출신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진핑이 틈을 뚫고 올라오게 됐나? 이야기가 아주 복잡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보시라이(薄熙來)가 강택민의 직계인데 보시라이 사건이 터졌을 때 그를 감싸주려했지만 보시라이 부인이 영국인을 독살한 사건이 드러나면서 호금도가 문제를 삼았지만 호금도 쪽에도 엄청난 문제가 터졌다. 중국 권력의 가장 실세였던 중판(중국 공산당 중앙 판공청)을 장악하고 있던 호금도의 측근 령계획의 아들 페라리 사건이 터지면서 양쪽의 권력싸움이 거세지자 호금도가 당, 국가, 군의 권력을 다 내려놓으면서 강택민까지 동반 퇴진 시켰다. 그리고 전권을 시진핑에게 물려줬다. 이것은 중국 역사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다시 말해 원로 정치 시대가 끝났다. 인치라는 것은 모택동(毛澤東)이 혼자서 국가제도를 주물렀던 흉악한 시대를 인치라고 부른다. 당, 군이라는 것은 초국가적인 권력이기 때문에 그 위에 있다는 것은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유일한 자로 군림하는 것을 인치라고 했다. 그의 후계자로 인치를 정통으로 물려받은 사람이 등소평(鄧小平)이다. 우리나라에 등소평은 굉장히 좋은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등소평은 작은 모택동에 불과하다. 똑같은 짓을 했다. 그래서 인치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제도를 만들어 법치로 가는 게 현재 중국 공산당의 최대 과제다. 그런데 호금도가 2012년 제18차 공산당대회에서 내놨을 때 보통은 권력을 한, 두 개쯤은 갖고 있으라고 권하는 게 예의인데 시진핑은 호금도께서 중국의 미래를 위해 영명(英明)한 결단을 내리셨다.고 찬양하며 이제 인치의 시대는 끝나고 법치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우리는 중국 멍을 말해야 된다. 중국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삼국지연의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metaphysic)이란 말, 이데아(idea)라는 말이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본질(essence)로 바뀐다. 네 삶의 본질이 뭐냐? 이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말이다. 이데아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고 현상은 이데아를 구현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목적론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무엇인가를 구현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느 게 결국은 플라톤 철학의 세속화 일 뿐이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하늘에다 올려놨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현상에 집어넣었다고 하지만 말장난에 불과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matter)의 질료를 갖다가 모양(form)으로 조작된 것이다. 예를 들면 지우개를 만들 때 종이, 천 솜을 각각 구입해서 지우개 모양으로 재단해 지우개를 만드는 것과 같다. 모든 지우개는 질료가 형상을 구현할 때만 지우개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해체하면 본래의 질료가 될 수 있고 그것들은 또 다른 것의 질료가 될 수 있기도 하다. 이 질료는 더 고차원적인 모양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맨 위엔 질료가 없는 폼(form)이 존재하게 되고 맨바닥엔 폼이 없는 순수한 질료(matter)만 존재한다. 순수한 진료와 폼이 존재하는 세계는 사실상 없다고 볼 때 이 세상은 matter & form이 섞여있는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matter는 가능태다. 잠재성(potentiality)이고 이것이 폼(form)과 결합했을 때 현실태(actuality)가 된다. 이 세상은 질료(matter)가 모양(form)을 만들어가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그렇다고 믿는다. 이것을 간단하게 비유로 말하면 맥도널드에 matter & form이 있는데 플라톤은 둘을 각각 분리시켜 놨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둘을 눌러서 아코디언처럼 쫙 늘려 놨다. 그리고 밑에 있는 것은 저 위로 갈수록 좋다. 그러나 과연 이 세계가 목적론적으로 나열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직선적 사고다. 노자가 말하는 천지 불인(天地不仁)에 완전히 대치되는 말이다. 우리는 이런 세계를 상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계는 질서가 있으면서 무질서한 세계다. 그리고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이것이 배열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핵이다. 이것은 중세 교부철학의 모태가 되었고 천주실의의 가장 핵심적인 논리다. 우리나라의 남인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남인을 통해 들어왔고 그것에 설득당한 사람들이 예수쟁이가 됐다. 오늘날에도 너 본질이 뭐야? 네가 구현해야 할 목적이 있는 존재가 아니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네가 있는 게 아니냐? 저 백합들이 거저 피어있냐, 저 백합꽃이 하니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핀 게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