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 서양철학사 30강
THESE : 삼국지의 문무와 아리스토텔레스
삼국지연의 기술(記述) 유래 : 최근 눈에 백내장이 와서 앞이 뿌연데, 이게 더 진행될까 걱정스럽다. 삼국지에 빠져서 시리즈 물을 보다 보니 아마 더 심해진 것 같다. 삼국지는 영웅호걸들의 이야기고 춘추전국시대 때 사마천의 사기열전 무대는 영웅호걸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사마천은 문학적 재치(才致)를 가지고 그걸 그렸고 전한, 후한에 중국이 통일된 이래(以來)로는 인물이 별로 나질 않는다. 물론 후한 때도 정연과 같은 학자는 있었으나, 그사람을 천재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후한이 끝나고 다시 삼국시대가 되면서 그야말로 영웅호걸(英雄豪傑) 시대가 도래했다. 손권, 조조, 유비의 시대라고 하지만 10대에 논자의 주를 달고, 20대 초반에 주역에 가장 탁월한 주를 단 왕필과 같은 사람이 활약한 시기다. 모짜르트가 서, 너살 때 작곡을 했다는 것은 이해가 될 수 있으나 그것은 음의 감관에 수학적인 재능이 있는 천재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음악이라는 것은 수학이니까, 감성만 거기에 첨가되면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10대에 노자의 주(註)나, 20대 초반에 주역의 탁월한 주(註)를 낸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삼국지는 원래 진수라는 사람이 정사(正史)를 썼는데 학문을 하니까 정사는 뒤적여봤어도 삼국지연의는 경시하게 되고 중, 고교 시절에 어깨노릇을 했기 때문에 주변에 독서하는 애들이 없어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그 무렵 박종화 선생이 번역한 삼국지연의가 3권으로 나와있었는데 읽지 않았다. 그래서 남들이 삼국지 얘기를 하면 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이 삼국지를 모르는 것은 특이한 케이스다. 나는 어려서 재빼기에 살았는데 큰 재빼기와 작은 재빼기를 아우르는 큰 집에 살았다. 이곳은 천안에 장이 열리면 장사꾼들이 길 양쪽에 물건을 내놓고 팔았다. 천안장이란 게 근동에선 꽤 크게 열렸다. 약장사도 있고, 짜이자 하면서 자신의 손목을 칼로 벤 후 약을 바른 뒤 만병통치라고 파는 사람, 등에 큰북을 짊어지고 발로 연결된 북채를 쳐 사람들을 끌어 모은 뒤 그림책을 들고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장이 열릴 때마다 재담꾼이 왔다. 그는 매번 다른 그림을 가지고 나와 이야기를 한다. 근데 그게 들을만했다. 난 어렸을 때 이걸 굉장히 많이 들었다. 중국에서도 삼국지연의가 초기엔 가닥가닥 끊어진 단편들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 의해 천여 년동안 만들어져 내려온 것이다. 재담꾼을 중국에서는 소화런(說話人)이라고 불렀다. 여기엔 기본적인 역사적 인물들이 있고, 역사적 사실들도 있으나 단편 이야기 중 민중의 지혜가 쌓인 것을 누가 더 재미있게 풀어가느냐에 따라 면면히 저자에 회자되어 내려온 것을 천여 년 후 나관중이라는 사람이 명나라 때 그것을 집대성해서 하나의 체계로 만든 것이 삼국지연의다.
말의 거간꾼 유비와 호위무사 : 삼국지연의라고 하는 것은 삼국시대의 역사가 있고, 그리고 정사도 있지만 그 이야기들이 민중에게 흘러나온 것들이 소화런(說話人)들에 의해 발전한 것이다. 삼국지는 단순히 삼국지가 아니라 민중의 갈망, 초야에 숨어있는 선비들의 문장실력과 그들이 바라보는 인간관, 역사관, 그리고 이러한 인물들을 어떻게 부각하느냐? 하는 문제를 다뤘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지연의에는 중국 역사를 바라보는 민중들의 소망이 담겨 있다. 그래서 삼국지연의는 결국은 유비라는 약자(弱者)를 가장 위대한 정통 군자로 만들려는 성향이 있으나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모든 인물 중에서 문무가 출중할 뿐 아니라, 출신은 비록 환관의 손자라고 하나 입양(adoption)된 인물로 이미 지체가 높은 분위기에서 생활했고 어려서부터 시에 능통했고, 권력의 맛을 알았고, 그러면서도 그 권력을 초월할 줄 아는 가장 위대한 인물은 역시 조조다. 현실적으로 그러나 조조에 대한 인물평가는 조선 역사에서 오늘날까지 간웅(奸雄)으로 평가가 박약(薄弱)한데 그것은 삼국지연의와 더불어 송나라 때 주자가 통사강목(統辭綱目)을 쓰면서 촉(蜀) 나라를 정통으로 봤기 때문이다.
최근 허베이 성 고분에서 중산왕 유승의 무덤이 나왔는데 미라가 옥으로 된 수의를 입고 있었다. 유비가 유승의 몇 대 손이라고 말하는데, 부정하기도 모하고, 긍정하기도 모한 게 유승의 자식이 백 명정도 됐다고 하니까 가능하긴 한데 거기서 갈라진 하나라고 해봐야 정통성을 따진다는 게 참 애매모호하다. 유비는 한마디로 얼빠진 놈이다. 조조와 비교가 안 되는 인물이다. 그런데 관우와 장비는 역사적으로 뚜렷한 인물로 유비와 동패였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도원결의는 했는지 안 했는지는 정사에 기록된 게 없으니 필경(畢竟) 소설일 가능성이 크다. 유비가 등장하게 된 것은 그 지역이 유명한 말 생산지였다. 말이라는 것은 팔려나갈 때 수송이 안 되는 것이라, 몰고 가야 하는데 말은 도둑들이 항상 탐내는 물건이기 때문에 말을 인계지점까지 안전하게 몰고갈 무사들이 필요했다. 유비는 말을 옮겨주는 거간꾼 노릇을 한 인물이다. 그렇다보니 상당히 지리에 밝고, 호위무사도 두고 부렸다. 관우, 장비도 그 때 호위무사로 뭉친 사람들이다. 그 때 소금은 국가에서 전매를 하는데 암거래를 하면 이윤이 많기 때문에 사염 밀매업이 성행(盛行)했는데, 대개 이 소금 밀매업자들이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말을 운반할 때 같이 다녔기 때문에 호위무사의 역할은 막중했다. 유비는 이때 자신을 한 왕실의 정통이라는 말을 하면서 호위무사들과 관계를 더욱 돈독(敦篤)하게 쌓으며 조조와 맞설 수 있는 역량을 길러갔다.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이 조조와 싸워서 크게 이기면서 손권은 강남의 대부분 땅을, 유비는 파촉(巴蜀)지방을 얻어 천하를 삼분하였다.
적벽대전은 조조가 남정에서 대패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적벽대전에서 대패하고 어떻게 조조가 살아남을 수 있었나? 오나라 손권이나 주유가 조조를 죽일 뜻이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오나라 책 사는 노숙이라는 사람인데 위(魏) 나라는 이미 북방의 막강한 세력인데 설령 조조가 없더라도 순욱이나 조비 같은 인물이 있기 때문에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조조가 위대한 점은 인간의 재능을 귀하게 여긴 것이다. 중국 역사에 조조는 인간을 사랑한 인물로 기록돼 있다. 가장 탁월한 지도자였고 사람을 알아보고 사람을 쓸 줄 아는 용인술에 능했다. 특히 책사들, 문학적 재능이 탁월한 사람, 사고력이 있는 위대한 지식인들에 대한 존경심이란 것은 절대적이었다. 예를 들어 원소 밑에 있던 질림이라는 사람이 격문을 썼는데 조조를 비방하는 글로 조조군이 쳐들어올 때 방을 붙였는데 그 글이 천하에 명문(名文)이었다. 그런데 그 문장에서 조조를 비방한 것은 이해를 하는데 "환관 놈의 새끼가 어쩌고" 하면서 삼대 조상까지 들춰내 깐 것에 대해 원소가 패한 후 질림을 불러 "나를 비방하는 것은 좋으나 내 조상까지 비방하는 건 부당치 아니한가?"라고 묻는 정도였다. 춘추에도 개인을 까는 건 괞찮은데 "자식의 죄 때문에 그 조상까지 싸잡아 까는 건 부당하다"라는 얘기가 실려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림을 질책했지만 죽이지 않고 그를 사랑해주었다. 비록 죽을죄를 지었을지언정 그가 명문가라는 이유로 그를 죽이지 않고 사랑해주었다. 격문을 읽고 그가 본디 두통이 심했는데 그 글을 읽고 분노가 치밀어올라 오히려 두통이 나았다고 한다. 이 내용은 삼국지연의뿐 아니라 정사에도 기록된 사실이다. 그 정도로 조조는 인물을 아꼈다.
관운장에 대한 사랑도 한 여인에 대한 사랑보다 몇 천배 더한 진실한 사랑이었다. 관운장을 그렇게 대했는데 유비의 거처를 안 후 홀연히 그의 곁을 떠났고, 조조와 관운장이 맞부디쳤을 때 관운장은 처음에 조조를 반드시 죽이리라고 마음먹었지만 패한 조조가 20여 명을 데리고 나타났을 때 청룡언월도로 한 번 휘갈기면 다 죽을 텐데 관우는 조조를 살려 보낸다. 그러고 나서 그 죄를 자기가 뒤집어쓰는데, 천하삼분지계라는 맥락에서 볼 때 제갈공명도 관운장이 조조를 죽이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거기서 조조를 죽이게 되면 끝날 것 같지만 조조가 죽게 되면 천하대란이 다시 오기 때문에 조조를 살려놔야 촉이라는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오나라와 위나라가 서로 견제를 해야 촉나라가 안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양인들은 어떠한 경우라도 개인적 분노라든가,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았다. 최근에 삼국지를 다시 보면서 철학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데 문무(文武)라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유비가 제갈공명을 만나기 전에 어떤 기인을 만나는데 "당신은 무만 있지 문은 없지 않으냐? 사실 그는 하급 무사에 불과했다. 당신은 문을 만나지 못하면 대업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만나게 된 게 서서를 만나게 되고 서서의 어머니를 조조가 납치하는 바람에 서서가 떠나게 되자 그가 "당신이 떠나면 나는 어떻게 하냐?" 최초로 문의 맛을 본 유비가 안달하자 가던 길을 되돌아와서 와룡선생을 추천해주며 "그분은 나와는 차원이 다른 분이다." 삼분지계에 문사의 등장도 눈여겨볼거리다. 위나라에 순욱, 사마의, 촉에 제갈공명, 오나라의 노숙 등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삼국지를 움직이는 겉태는 무(武)지만 삼국지를 움직이는 실제 싸움은 문사(文士)들이 하는 것이다. 근데 이 무(武)는 실수가 많고 엉터리들이다. 반면에 문사(文士)는 치밀하고 합리적(rationality)이다. 이에 반해 역사를 움직이는 칼잡이가 있는 것이다. 칼잡이와 붓 잡이들의 조합이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중국 역사를 보면 군주 제고 영웅호걸들의 난세같이 보이지만 어떠한 난세에도 책사들의 합리적인 기반이 있었다. 중국 역사에는 합리적인 기반이 깔려 있고, 여기에 오만방자하고 무도한 칼잡이들이 있었다.
오늘날 무라는 것은 오로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천하통일을 꿈꾸고 부귀권세를 누리려고 하는 건데 조조는 유일하게 문무를 겸한 사람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역사의 문제점이 뭐냐? 문무(文武)란 걸 잘 생각해봐야 한다. 권력을 추구하는 무만 존재할 뿐 문은 존재하지 않는 게 문제다. 오늘날 여, 야의 모든 문제가 진정한 문사가 없고 무사만 있는 꼴이다. 그렇다고 진짜 무사도 아니지만, 국회의원이라고 해봐야 무에 속해 있지 문사는 없다. 동양에서 철학은 무(武)를 움직일 수 있는 문사(文士)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양에서 철학(philosophy)이란 궁극적으로 칼을 제압하는 지혜 라야 철학인데 서양에서는 이러한 문무(文武) 개념이 없다.
서양철학에선 책사들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나마 융합되는 시기에 루크, 몽테스키, 로크 등이 나오는 계몽주의 시대 비로소 철학들이 정치에 비젼을 제시하고 정치가들이 그 비전을 받아서 제도를 만들고 이러한 과정이 연합이 이뤄지면서 근세 서구사회가 만들어졌는데 사실 이런 수준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삼국지를 보면 동양에서는 문무를 겸비해야 한다는 이상(Ideal)은 항상 우리에게 절실했던 문제라는 것이다. 삼국지를 영웅호걸의 이야기로 잘못 알기 쉬운데 영웅호걸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책사들의 싸움 이야기다. 제갈공명, 사마중달과 노숙의 싸움인 것이지 손권, 유비와 조조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벽대전(赤壁大戰)이라는 게 만약 책사들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조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철학은 철학일 수 없다는 것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은 희랍의 관념논자들이 아니라 뭔가 절실한 폴리스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철학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거기에 대한 충분한 의미를 모르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칸트를 공부하는 사람은 칸트를 연구만 했지 오늘날 우리 역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철학은 철학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서양철학을 한 자가 우리나라 정치의 제도적 변화를 이룩했다든가, 정계에 나가서 전환점을 이룩했다든가, 구태어 정계에 안 나가더라도 거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하는 자가 아직 없다. 시대적 상호작용(interaction)이 없으면 철학을 했다고 말할 수 없다.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단연코 그것은 철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플라톤에서 헤겔까지 철학적 체계를 공부하는 걸 철학이라고 생각해왔었다. 이러한 철학의 개념을 소위 삼국지의 문무(文武)의 개념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다. 동양에서 왜 그렇게 문무에 중요성을 이야기하는지를 삼국지를 통해서 깨달았다. 오늘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아리스토텔레스 : 아리스토텔레스(BC384 ~ 322)는 스타지라 인 테라스(Stagira in Thrace)에서 태어났다. 대체적으로 맹자와 비슷한 시기에 사람인데 니코 마쿠스(Nicomachus)라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의사의 아들이라는 게 중요한데
생물학적인 입장이 이사람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기하학을 모르는자는 나의 아카데미아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려서부터 의학, 생물학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보통 플라톤의 철학을 관념실제론이라고 말한다 이데아(idea)의 세계를 실재(reality)로 보고 지성(intellect), 예지의 세계라고 한 반면, 변화(change)와 감관(appearance)의 세계, 감성의 세계로 양분 짓는데 이데아의 관념만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이데아(idea)의 세계를 형상(form)이라고 말한다면 변화하는 세계 속으로 형상을 집어넣었다. 다시 말해 이데아(idea)라는 것은 변화하는 시, 공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변화와 감관의 세계는 결국은 물질(matter)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는 form & matter가 중요한 말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idea를 eidos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시간에 이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