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 서양철학사 27강
THESE : 플라톤의 오류, 지식은 지각이 아니다.
철학자의 삶 반추(反芻) : 2016년 벽두(劈頭) 강의를 시작하면서 올 한 해가 도약(跳躍)의 해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동안 살아온 지적인 여정에 많은 것이 축적되었고, 그것들이 어떠한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비상(飛上)하는 해가 될 것으로 생각되지만 나 자신을 반추(反芻)해볼 때 아직도 아는 게 없고, 애매모호한 상태다. 하다못해 버트란 러셀의 "서양철학사"같은 책을 들여다보더라도 여전히 20대에 들여다봤을 때와 똑같이 모호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애매모호한 느낌이 드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모호한 게 아닐까, 플라톤도 모호하고 아리스토텔레스도 모호하다. 러셀이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다루는 자세도 역시 20세기를 살았던 분석철학자의 입장에서 특히 논리학적인 입장 그가 말하는 논리학이라는 게 재래 논리학 아주 정교한 인식 논과 결부된 논리학은 우리가 따라가기가 너무 고통스럽다. 그것은 영어라고 하는 언어에서 파생되는 문제지 그게 우리 문제 같지 않다. 그래서 서양철학을 접할 때마다 아주 고통스럽고, 아주 곤혹(困惑)
스럽다. 최근에 프레시안에 박인규라는 사람하고 통화를 하면서 현대 중국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캐피털리즘(capitalism) : 차우량은 현재 인민해방군 소장인데 이 사람이 쓴 글이 상당히 탁월(卓越)하다. 현재 미국과 중국의 문제, 그리고 둘 사이에서 바라보는 세계정세에 관해서 아주 치열(熾烈)한 논쟁을 전개하고 있는데 결국은 자본주의라는 것이 페르낭 브로델(1902 ~1985.11.27 / 역사학자)이 이야기한 것처럼 시장의 논리에 의해서 얻어진 이윤을 착취(搾取)하는 게 아니라 시장은 구석기시대부터 꾸준히 있는 거고, 그 시장에서 생기는 이윤을 가지고 자본주의가 생겼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이것은 막스(1818 ~ 1883)가 근본적으로 19세기 산업사회의 특수성을 가지고 착각(錯覺)을 한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게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경우만 보더라도 아무리 착취해 확대 재생산을 한다고 해야 큰돈을 버는 게 아니다. 여행 다니고, 자녀 교육시킬 정도에 불과하다. 캐피털리즘(capitalism)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시장의 논리가 아니라 안타이 마켓(anti market)이다. 시장을 뛰어넘는 어떠한 폭리를 취하는 싸움인데, 일례로 도둑질한 물건을 팔아서 얻는 금전적 이득, 인류사에서 도적질 해서 폭리를 취할 수 있는 건 전쟁이다. 전쟁(戰爭)이란 폭리(暴利)를 취하기 위한 물류 혁명이다.
한 예로 16세기에 영국의 해적질을 들 수 있다. 당시 영국은 해양진출을 하기엔 해군력이 약했기 때문에 스페인 무적함대에 대적할 수 없자 우회적으로 금, 은 보화를 싣고 가는 배를 노략질하는 전략을 추구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사략 허가증(prvateers license)까지 발급해줬고, 해적 존 호킨스와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결국 해적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됐던 항구도시들이 자본주의 도시로 발전해갔다. 동양권에서 해적질의 대표적인 집단이 일본이다. 일본이 근세 동아시아의 자본주의 국가로 나설 수 있던 배경엔 왜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둑질의 역사, 전쟁의 역사가 인류의 자본주의의 참모습이다. 이게 안타이 마켓(anti market)이고 초 시장의 논리다. 시장의 논리로는 큰 자본을 축적할 수 없다.
중국의 개념을 세운 청 : 오늘의 중국은 청나라가 명을 멸망시키고 3대째 순치(馴致)를 했던 옹정에서 권륭제까지 135년 간인데 권륭제는 우리나라 영정조 시대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오늘날 말하는 중국의 개념이 성립했다. 모택동이 물려받은 중국의 강혁은 동북군의 장향량만 독자적으로 성공했어도 오늘날 강혁에서 떨어져 나갔을 것이고, 장개석이 절강 상인과 부패하지 않고 잘 지냈으면 양자강 이남은 떨어져 나갔을 거고, 티베트, 위구르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걸 하나로 만든 것은 권륭 시대 때 세워진 개념 때문이다. 이들이 누구냐? 고구려 후손이 오늘날 중국의 개념을 만들어준 것이다. 내가 말하는 고구려 패러다임이 중국을 만들어 준 건데 결국은 이 패러다임에 그들은 성인 지치(聖人之治)를 달성한 것이다. 명나라가 얼마나 부패했냐 하면 그 당시 만주족이 백만 밖에 안 됐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3억의 인구를 통치한다는 게 사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건데 이들이 어떻게 통치할 수 있었냐? 이들은 명이 멸망했기 때문에 도탄(塗炭)에 빠져있는 백성을 구한다는 명분(名分)을 내세우고 북경에 입성할 때 민이 순응했기에 가능했다. 그러고 나서 부패 고리를 끊고, 부강한 국가를 만든 것이다. 권륭 시대 때만 해도 여러 면에서 세계 최강의 대제국을 만들었는데 서양 제국주의 놈들이 들어와 아편전쟁을 일으키고, 영토를 할양받는 등 착취하고 괴멸시켜가는 과정에서 결국은 20세기, 소위 말하는 열강의 발호(跋扈)가 모택동의 강혁으로 재 정리가 된 것이다.
금을 버린 미국의 달러 시장 : 1945년 8월 15일을 기억해야 될 게 아니라 1975년 8월 15일을 기억해야 한다. 이날이 미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한 날이다. 당시 월남전에 닉슨 독트린이 나오면서 월남전에서 크게 패하면서 금본위제를 적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미국 달러는 금으로부터 해방이 된다. 그 후 달러는 금으로부터 독립한 후 독자적으로 기축통화(基軸通貨)의 역할을 하게 된다. 달러를 가지고 세계를 조작(操作)해 가는 과정이야말로 기나긴 자본주의 역사에 있어서 전쟁을 통하지 않고 기축통화라는 하나의 수단을 가지고 전쟁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전쟁을 치르는 게 화폐전쟁이다.
이런 변화로 미국 경제는 실물경제가 공동화(空洞化) 되어가고 달러 조작을 통해서 자본(capital)을 움직이는 방법으로 세계를 조작해 가면서 결국은 막대한 이득을 취하고 있다. 달러가 기축통화 노릇을 할 수 있는 건 미국의 군사력이 막강하기 때문에 달러의 조작뿐만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하는 무력이 전쟁도 일으키고 때에 따라선 금리를 낮추고 높여 흐름을 조정하지만 차우량의 주장은 미래사회에서 미국이 중국을 견제(牽制)하는 방향에서 대적 관계를 만들어 가려 하지만 미국의 적은 미국일 뿐이고 결국 미국을 망하게 하는 건 미국 이니까 스스로 어떻게 달러를 넘어서서, 도덕적인 부분을 회복해야 할 것인가 이게 관건이라는 이야기다.
차우량이 중국의 군사력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21세기 사상에 있어서 핵은 노자로 돌아가야 하지 않냐! 물론 이건 내 생각이다. 허황된 물류라든가 인간의 존재양식을 생산양식과 물류 양식의 변화라는 한 측면에서 오늘날 정보사회, 인터넷 문화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갖게 하지만 궁극적으로 인류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욕망의 문제라고 본다. 인간의 심오한 문제가 욕망이라면 이걸 어떻게 절제할 것이냐? 이걸 가지고 고민한다면 미국을 포함한 가진 자들이 부귀(富貴)에 대한 열망을 절제하고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게 인류에게 가장 본질적(essential)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1차적으로 농촌경제가 살아나야 하는데 농촌경제는 몸의 문제고 식 색의 문제다. 먹는 것도 중용하지만 절제도 중요한 문제다. 욕망(欲望) 중에서 욕이 문제인데 플라톤에선 이걸 정면으로 다루질 않고 결국은 지식(知識)으로 간 것이다. 우리가 욕망(欲望)을 다루게 되면 윤리학적으로 가야 한다. 어찌 보면 동양고전은 윤리의 문제다. 서양의 모든 학설이라는 것은 knowledge다. knowledge라는 것은 truth(진실)의 문제다. 이것은 또 episteme(인식)의 문제가 된다. 플라톤은 "지식은 지각이 아니(knowledge is not perception)"라고 했다. 이게 서양철학의 대명제다. 지각이라는 것은 감관을 통해 시공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음식은 요리를 해서 따듯할 때는 맛이 있는데 식은 후 먹게 되면 맛이 없어진다. 따라서 맛은 상황에 따라 변한다. 이것은 지식이라고 보지 않았다. "저 여자는 아름답다." 이것도 역시 지식이 아니다. 그 여자는 억울해 할 수 있지만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다(is)는 영원의 불변 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게 파르메니데스부터 꾸준히 내려온 것으로 완벽한 불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철학에서는 이게 핵심이다.
idea(beeing)는 불변의 세계고, 관념의 세계다. 영혼은 이데아의 세계고 이데아에 대한 추억이 있다. 그래서 회상을 하는 것이다. 반면 육체는 감각계에 속하고 감관이란 걸 통해서 인식한다. 인간은 관념의 세계와 감관의 세계를 직관하며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그러나 감각계는 이데아의 세계를 분유 하지만 단절에 의해 거기엔 영원히 못 미친다. 다만 이데아를 직관할 수 있는 영혼 즉 이성을 갖고 있다. 인간의 영혼을 3단계로 분류하는데 1) 정욕의 덕(sophrosyne)/ 절제, 2) 기개(andreia /氣槪)/ 용기 3) 이성(sophia),/ 지혜이다. 정욕, 기개, 이성의 조화를 정의(dikaiosyne)라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개인의 정의는 큰 의미가 없다고 봤다. 인간은 사회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절제,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데 서민들은 절제를, 군인과 관리에겐 용기를 그리고 통치자에겐 지혜가 요구된다고 했다. 플라톤의 주장에서 지식은 지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난센스다. 논리학에서 배중률(排中律)은 A 이거나 B라는 흑백의 논리다. 또 모순율은 A & B가 동시에 참이 될 수 있는 경우다. 플라톤의 이원론은 배중률이나 모순율 중 어느 쪽에도 적용될 수 없다. 서양철학은 근본에서 잘못된 것이다. 인간의 문제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다. 과학도 결코 진리를 밝힐 수 없다. 진리를 밝혀가는 과정에 테크놀로지(technology)라는 부산물을 얻어가지고 오늘날 문명을 건설했다고 하지만 진리라는 것에서 knowledge를 perception에서 분리해 사용할 수 있냐? 그것은 말이 안 된다. knowledge = perception이다. 우리가 감성을 가지고 지각하는 세계와 이성적 세계는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 서양사람들은 언어 그 자체에 매료돼 형식적 관계에서 진리를 발견하려고 했다. 또 수학적 세계를 진리의 표준으로 삼았지만 수학적 세계가 감성의 세계와 분리되는 게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를 형상의 세계로 보고, 질료라고 하는 matter의 세계로 집어넣었지만 이 역시 플라토니즘의 변형에 불과한 것이다. 이데아와 현상계를 분리하는 논의에선 인간은 찾을 수 없다. 플라토니즘은 완벽한 오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