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강의

도올 김용옥 서양철학사 21강

해암 송구호 2021. 12. 3. 07:45

THESE : 소크라테스 - 플라톤과 크세노폰

 

소크라테스(BC 470 ~ 399) : 소크라테스는 실존적 인물이다. 반면 예수는 실존 여부에 대한 문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가상적 인물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예수보다 470년 앞선 인물로 예수의 삶과 소크라테스의 생애(生涯)는 거의 동일하다. 일부 학자들은 예수가 소크라테스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진 가공인물이란 주장도 있다. 알고 보면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것이나 소크라테스가 재판에서 죽음을 선택한 것은 같은 형태다. 메시지도, 말하는 것도 같다. 소크라테스가 예수와 다른 것은 일체의 종교적 해위를 안 했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종교적 신념이 있다고 해 종교적 행위나, 종교적 제도상의 의식과 무관했다. 이것이 철학과 종교를 구분 짓는 역할을 하게 했다. 소크라테스에게도 종교적 순교(殉敎)의 의미가 있었으나 철학자로서 조종(祖宗)의 반열에 오른 것은 종교적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신념의 체계, 믿음의 체계를 남에게 강요한적이 없다. 이 사람의 생애를 한마디로 말하면 "변론(辯論)"의 생애였다

변론의 생애라는 게 소크라테스에게 변증법(Dialectic)은 일종의 말싸움(open debate)다. 

 

역사적 소크라테스 : 당대 유명인사 였고 소피스트를 비판했다. 아테네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고발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죽었다. 그 외에 그의 부인이 악처였다는 등 떠도는 말은 근거가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Platonic 소크라테스 : 플라톤의 문학적 능력이 탁월해서 소크라테스가 허구(虛構)화 된 면이 크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변명(apology)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플라톤이 법정에서 변론 과정을 기록한 것 외에도 소크라테스가 그에게 부탁하는 것까지 기록되어 있다. 플라톤은 레슬링 선수로 메달까지 땄던 인물이다. 당시엔 미덕(virtue)이라고 해서 아름다움은 곧 지식을 내포한 힘을 의미했다.

크세노폰(Xenophone) 소크라테스 : 우리나라에 크세노폰에 관한 자료가 없어서 미국 하버드대에서 발간된 영어와 희랍어로 발간된 책 10권을 구입했다. 크세노폰도 굉장한 전사였는데 그는 플라톤처럼 문학적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신빙성(信憑性)이 있고 사실에 가까울 것이기 때문에 기대된다. 지금까지 소크라테스에 관해서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기록을 비교하거나 연구한 문헌이 없었다. 크세노폰의 책을 구입했으니 따져보면 재미있을 것같다. 요즘 내가 쓴 책이 팔려야 빈곤한 서재를 손볼 텐데 책이 들어와도 어디에 놓아야 할지 고민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오로지 이 강의를 통해 승천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광개토대왕비에 보면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세상사는 게 귀찮아져서 왕위를 물려주고 동강에 올라가 하늘을 향해 빌기를 " 나의 천자시여 나를 데려가소서"라고 비니까, 고구려의 만백성이 환호하고 춤추며 즐거워했다.라고 한다. 세상사가 괴로우니 이런 생각도 하게 된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 스위스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Saussure)는 기호란 분리 가능한 두 개의 요소 즉 시니피앙(signifiant)과 시니피에(signifie)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호속의 발음을 시니피앙, 그 발음에 의해서 생기는 관념적 내용을 시니피에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이들 상호 불가분의 개념을 언어의 본질로 규정하면서 기호와 사물의 관계는 우연적인 결합에 불과하다고 역설하였다. 소쉬르의 이러한 이론은 언어학뿐만 아니라 구조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구조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라캉(Jacques Lacan)은 시니피앙의 우위를 나타내며 시니피엥과 시니피에 사이의 경계선 결여가 정신병을 초래한다며 이를 정신병리학에 원용하였다. 

인간의 언어라는 게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접합시키는 과정은 완전히 임의적이란 것이다. 상형문자에서 뫼산(山)이 산의 모양을 보고 그린 게 아니고 산이란 시니피앙(표음문자), 즉 acoustic image가 있었고 그것을 산과 매치시킨 것이라는 이야기다. 언어가 생겨나기 전에 이미 개념이 존재했다. 

 

open debate : 대화를 나눌 때 같은 말을 쓰는 것 같은데 머리속에서는 제각각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딴소린데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open debate는 논리적 일관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의 말이 의미하는 게 뭐냐?" 즉 "개념(definition)이 뭐냐?"라고 물음을 한 것이다. 이것은 말의 모순을 지적하고 헛소리를 막을 수 있다. 개념에 대한 물음이 open debate다. 러셀은 토론의 방향이 본질을 꿰뚫지 못할 경우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생물의 발견 전엔 질병에 대한 추측이 여러 가설을 만들었지만 미생물을 발견한 후 일거(一擧)에 정리됐다. "병은 박테리아가 퍼트린다." 소크라테스의 신념은 의사불통을 거둬내서 사회가 건강해지길 바랬다. 개념의 확립과정을 말싸움이라고 한 것이다.

 

청년을 타락(墮落)시킨 죄 : 고소장에 "소크라테스는 사악한 자니 땅 아래 있는 것과 땅 위에 있는 것을 탐구하는 자이고 나뿐 명분을 좋은 명분으로 보이게 하는 기술에 능한 데다가 그런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가리키기까지 한다."라고 쓰였다. 이것은 표면상의 이유에 불과했고 본질은 아테네 인들이 받들어 모시는 신을 믿지 않았다는 것과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는 게 그의 죄목이다.  소크라테스는 합리주의자였기 때문에 토론(open debate)을 통해 무엇이 옳은가를 따져 들어갔기 때문에 골치 아픈 인물로 낙인찍은 것이다. 

 

델피에 신탁(神託) : 신에게 아테네에서 누가 가장 현명한 자인가 물었는데 소크라테스 이상의 현자(賢者)는 없다.라는 답을 얻었다. 소크라테스는 신탁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하길 "내가 현명한 자"라는 말은 이상하다. 그러나 신의 말은 거역(拒逆)할 수 없으니 아테네에 있는 현자를 찾아다니면서 진리에 대한 토론(battle)을 벌여야겠다. 소크라테스는 그들과 만날 때마다 크게 실망했다. 물음에 대한 대답이 너무 궁색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테네 현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저주(詛呪)스러웠을 것이다. 신탁이라서 그와 논쟁을 피할수도 없었고, 대화를 하면 공개석상에서 망신을 당한 꼴이 되니 죽이고 싶도록 미웠을 것이다. 

 

독배를 든 소크라테스 : 소크라테스에게 배심원이 내린 벌금형은 30드라크마였는데 소크라테스는 벌금이 과하다고 반발을 했다. 제자들은 탈옥을 권했지만 그는 독배를 들었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죽어서 오르페우스, 호머, 헤시우드, 무사 이우스 등과 open debate를 하겠다고 했다, "내가 그들을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내가 떠날 때가 되었다. 내가 죽을 시간이 되었다. 우리 모두 우리 길을 간다. 어느 길이 나을지는 신만 알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 갖혀지내다가 죽음을 맞으면 영혼은 자유를 얻게 된다는 영혼불멸 사상을 믿었다. 이런 주장은 사도바울적 세계관이다. "나는 현세 암흑 속에서 등에(getfly)로부터 시달림을 받다 광명의 세계로 간다. 내가 가면 너희들은 영원히 깨지 못하고 잠들고 말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생애는 오르페우스적 성자를 꿈꾼듯 하다. 그는 길을 걷다가 움직이던 상태로 멈춰 선 후, 하루, 이들씩 그대로 서있고, 물욕, 정욕의 노예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금욕생활을 실천했다.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한 번 마시면 말 술을 마셔서 그와 대적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또 추운 겨울에 맨몸으로 행군을 하며 극기를 다졌다. 소크라테스는 이원론자였다. 그의 사상이 스토아 학파에 영향을 줬고 중세 기독교로 이어졌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서양철학의 출발이다. 잘 새겨보면 서양사조의 큰 줄기를 알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