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은 형극(荊棘)이자, 최후 심판의 형틀.
우리 앞집엔 종례라는 누이가 있었다. 그녀는 태어날 때 척추마비 장애로 손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집에 우물이 있어 가끔씩 물을 길러 가기도 하고 심부름으로 갈 때면, 마루에 겨우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의 동선에 눈길을 주면서 웃는데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내리는 침이 길게 늘어져 바닥으로 떨어져 흘린 침을 닦아주지 않으면 이내 파리가 들끓었다. 가족들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침 흘리는 것이 다반사라서 잔손 보태는 것에 염증을 느낀 탓인지 제때 닦아주는 경우가 드물었다.
여름날엔 돼지우리가 있는 대문 앞에 나와서 하루 종일 앉아있는데 마치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듯, 늘어진 엿가락 모양으로 축처진 채 하늘거리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거꾸러지지 않고 하루 종일 잘 버티는 것이 신기한 일이다. 그녀는 지나가는 사람들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지만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마치 투명인간처럼 눈에 띄어도 보이지 않는 존재다. 하지만 그녀가 앉아있는 자리 1m 전방에 접근하면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그녀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입을 헤 벌리고 웃는데 그럴 때마다 입에 고였던 침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곁을 맴돌던 파리들이 윙윙 소리를 내며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이 집에 사는 식구들은 늘 어둔 그늘이 있다. 또 이 집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역한 냄새가 난다. 그래도 가을에 거둬들인 볏가리를 보면 대놓고 무시할 수 없는 부잣집이다. 가족들이 웃는 모습을 볼 수 없던 것 중 하나는 고부간 갈등도 한몫했다. 꼬장꼬장한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에 충돌이 이웃집에서 알아챌 만큼 간간히 들리곤 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이 가족에게 부담을 주던 장애인 딸과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얼마뒤 여름 낮 오수를 즐기던 안방마님이 독사(毒蛇)에 물리는 일이 벌어졌다. 뒤 뜰이 한 자 반은 족히 넘을 텐데 문지방을 넘어 방안까지 들어간 뱀도 예삿일이 아닌데다 잠자던 사람을 물었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기상천외한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시어머니의 원혼이 며느리에게 해코지했다고 수군거렸다. 그 후 동네에 도는 소문이 사나웠던지 부지불식(不知不識) 간에 서울로 이사를 갔다. 기와집도 빈집으로 비워진 채 시간이 흘러간 탓에 영 못쓰게 돼 헐렸고 지금은 남에게 팔렸고 공터로 남았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이 있다. 과거엔 대를 이어야 한다는 중압감을 갖고 딸을 낳으면 한숨과 함께 다시 아들을 낳기 위해 임신을 하고, 몇 회를 반복하다보면 ‘딸 부잣집’이란 이름을 얻는 경우가 허다했다. 요즘엔 젊은이들 사이엔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을 전제로 결혼하는 경우가 흔하다. 욜로 족들은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보내는데 자식을 낳아 양육하는 것은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미(歐美) 선진국의 경우 만 19세가 되면 부모로부터 자립해서 살아간다. 그 나이가 돼서 부모와 함께 살면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되묻게 된다. 장애가 있거나 덜떨어진 아이가 아닌 이상 독립해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태어나서 성장하는 과정에 부모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것이 없고 성장해서 성인이 돼도 스스로 독립하려는 의지가 없다. 아마 부모가 자립적인 개체로 양육하려는 의도를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호주에 사는 캥거루처럼 외형적으론 성체가 됐는데도 불구하고 아기 집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부모의 소득은 한계가 있고 자녀들의 독립은 늦어지다 보니 노후 준비할 여력이 없어서 결국 늙어서도 생활비를 벌기위한 노동현장에 나서야 된다. 장성한 자식들은 대학 등록금에서 용돈까지 당연한 것처럼 손을 내민다. 그리고 결혼을 한 후에도 맞벌이를 핑계로 부모에게 자녀 양육을 의탁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남들에게 불안해서 맡길 수 없다는 말을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부모의 손을 빌려 한 푼이라도 돈을 아껴보려는 속내가 숨겨져 있다. 늙어가는 부모에게 아이 양육은 형극이다.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끝 없이 되풀이 되는 고통을 짊어진 채 사는 것이 한국 대부분 부모의 삶이다.
감당할 수 없는 육아, 교육비는 이 사회의 출산율을 떨어트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자녀들이 노부모에게 손자의 양육을 의탁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따라서 맞벌이 자녀를 사회에서 돌볼 수 있는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 물론 미래엔 인구가 감소해도 4차 산업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노동을 감당할 경우 사람의 노동력은 하찮아질 게 뻔하기 때문에 차라리 무자식이 상팔자일지 모른다.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 없는 시대에 일자리가 없어 방안에서 뒹굴고 있는 자식을 보면 울화가 치밀어 오를 수 있다. 과거엔 새벽 밥을 먹여서 공부시킨 아들이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면 어깨에 힘주고 동네 골목길을 휘젓고 다녔는데 이젠 대학 공부시켜 놓아도 방구둘 귀신이 돼서 앉아있으니 부모에겐 속상할 일이다. 설령 좋은 직장을 잡아 결혼한다 해도 반길 일이 못되는 게, 손자를 낳으면 키워달라고 맡길 터니 몸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온 몸이 무너져 내려도 자식 걱정에 편할 날이 없다. 따라서 자식은 원수(怨讐)가 아니라 마지막 죽기까지 짊어질 형틀이다. 또 자식 양육에 그동안 번 돈을 다 써버린 부모는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 됐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내줘야 끝난다. 그 것을 바라는 자식은 살모사(殺母蛇)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