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족 이야기

하얀 눈이 펑펑 내리던 날

해암 송구호 2019. 6. 2. 15:51



 

 아버지(1976년 2월 2일)와 어머니(1995년 8월22일)는 설과 추석 가까운 때 돌아가셨다. 두 분의 장례식이 있던 날엔 함박눈이 내렸다. 흰 꽃으로 장식된 상여가 동네 어귀를 지날 때 거짓말처럼 하얀 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두 분이 이 땅에서 힘겹게 살아왔던 시간에 대한 따듯한 위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어머니는 윤달이 끼긴 했어도 눈이 내리기엔 이른 때였지만 소담한 꽃눈이 내려 당신의 가는 길을 맞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 세상 삶엔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하늘도 감동했고 영혼이 돌아가는 길에 수백만 송이의 눈꽃을 뿌려 두 분을 맞이한 것이라 믿는다.

 아버지는 작고 왜소한 몸매로 대식구를 건사하느라 잔등이 굽어졌고 하루 종일 논밭에서 일하느라 얼굴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논, 밭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쇠꼴을 지게에 한가득 채워오시곤 했다. 새벽녘에 나가 밤에 별빛을 따라 집에 들어오시곤 하는 모습을 보면서 삶의 무게를 느껴야 했다. 아버지의 낙이라면 술과 담배였다. 집에서 막걸리를 직접 담가 먹기도 했는데 동네 친구분들은 술이 익을 때가 되면 귀신처럼 알고 싸리문 밖에서 "재순이 !" 하며 아버지를 불렀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윗목에 잘 익은 술을 퍼서 대접하곤 했다.

 아버지는 큰형님에게서 손자가 생기는 것을 바라고 바랬다. 그렇게 고대하던 손자를 손에 안아 보지 못한 채 61세가 되던 해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큰형은 딸을 일곱을 낳아야 했고 당신이 돌아가신 후 늦둥이로 아들을 얻었다. 병이 깊어가고 죽음이 임박할 무렵 둘째 형이 아들을 낳았고 고추가 찍힌 사진을 보내와 손에 들고 좋아했는데, 아버지는 대가 끊기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갖고 편히 눈을 감으셨던 것 같다. 

 농사는 고되고 힘들게 일한 것에 비해 돈이 되질 않았다. 남들처럼 땅이 많지도 않아 늘 제자리 걸음을 하듯 삶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가난한 집에서도 사기꾼이 안방에서 잠을  자며 얼마 안 되는 땅을 뺏어갔다. 아마 기억으론 그자가 홍 인표였던 걸로 기억된다. 큰형님에게 접근해서 사기를 쳤다. 없는 집에서 죽어라 죽어라 하는 일이 꼬리를 물고 생겨났다. 그놈에게 사기를 당한 후에도 아버지는 크게 역정을 내지 않았던 거 같다. 

 제사를 지내는 중 어느 날인가 큰형이 "아버지 저 이제 더 이상 제사를 올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으셨지만 이내 "네 뜻대로 해라."라고 말씀하셔서 그 이듬해부터 제사상을 차리던 모습은 우리집에서 사라졌다. 처음 몇 해는 상차림을 해놓고 기독교식이라며 예배를 드렸고 그 후부터는 제삿날에 성경 책을 펼쳐놓고 찬송가와 간단한 설교 그리고 기도로 참 간단한 형식을 통해 제사를 대신했다.

 아버지는 75년도에 위암에 걸리셨다. 병원에서 절망적인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 1년 넘게 병마와 싸우다 종국엔 돌아가셨다. 병원에서 치료를 하자는 권유에도 단호하게 뿌리치고 돌아올 때 삶의 끝자락에 도달하고 있다는 막연한 절망감이 얼마나 컸겠는가? 아버지는 큰형의 짐자전거에 매달려 집으로 돌아올때 뼈만 남은 모습이 그간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나를 가늠케 한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에 대하여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흔한 말로 다가오고 있는 죽음에 대한 분노조차 느끼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간 하루하루를 힘겹게 사셨던 것에서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그 시간이 그나마 이승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었던 셈이다.   

 가난은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났다. 사과 궤짝처럼 엉성한 관(棺)에 아버지를 모셔야 했다. 평생을 때에 찌든 모시적삼을 입고 살다가 마지막 가는 당신을 모신 재궁(梓宮)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에서 교인들이 손수 만든 흰 꽃으로 장식한 상여가 그나마 서글픔을 덜어냈다. 요령이 울리고 상여꾼이 동네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갑작스레 하늘문이 열리고 흰 눈꽃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친구에게 부탁해 얻은 안식처에 들기까지 함박눈은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95년도 추석 일주일 후에 돌아가셨다. 동네에서 이웃과 소소한 것을 나누며 따듯한 감정을 지녔던 어머니는 늦게 얻은 장손을 품에 끼고 살았다. 큰형님도 당신의 아들이기 전에 

어머니에게 손자를 안겨줄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해했다. 애지중지 끼고 살던 손자는 어머니가 살아가는 이유가 됐다. 그러나 세상은 변해가고 있었다. 농경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대가족 사회가 핵가족 사회로 분화되어 갔다. 장손의 역할도 따지고 보면 사라지고 없었다. 각자 도생(各自圖生)이 시대의 대세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농촌의 삶은 더욱 궁핍해져 갔고 서울에선 월급을 받고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 점점 자리를 잡게 됐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돌아가시기 전 하신 말씀은 시골집을 떠나지 말라는 당부였다. 어머니는 나이 칠십을 넘긴 후론 서울 나들이를 끊으셨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심사로 십 년 뒤 죽기까지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셨다. 어머니는 콩알 하나가 생겨도 이웃과 나누며 사는 것이 몸에 배어있었다. 나눔의 놀라운 기적은 콩 한쪽을 가져다주면 받는 쪽에선 돼지고기를 주기도 하고 방금해 놓은 떡을 주기도 하고 여하간 가져간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받아왔던 기억이 난다. 나눔은 큰 사랑이었다.

 어머니는 밭일로 오른쪽 무릎에 이상이 생겨 명랑이란 약을 장복하며 살았다. 밭일은 항시 쪼그려 앉은 자세로 일을 하게 되다 보니 오른쪽 무릎을 상하게 됐다. 통증을 완화시키는 약으로 기억되는데 나중엔 오이 씨앗처럼 생긴 약을 함께 먹었다. 무리한 밭일로 다리를 절게 된 어머니는 병원 한 번 가보지 못한 상태로 생을 마감했다. 

 가을이면 상수리나무 열매인 도토리를 주우러 다녔다. 도토리를 털기 위해 나무 망치인 곰방메를 들고 다니며 나무둥치 부분을 치면 열매가 후드득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한 번은 땡 벌의 둥지를 건드려 온몸에 벌을 쏘이고 집에 와서 된장으로 화기를 가라앉힌 적도 있었다. 

  추석이나 설이 되면 각지로 흩어져 지내던 형제들이 한곳으로 모여든다. 추석 전날 쌀가루를 반죽해서 송편을 빚는데 마루에서 둥근 광주리에 솔잎을 깔고 반달 모양으로 만들어 그 안에 속을 넣고 오므리면 된다. 설엔 가래떡을 뽑아 밤새 곤 조청에 찍어 먹는 것이 일품이었다. 명절이 가까워 오면 항시 언제 올지 모를 형제를 생각하며 귀와 눈은 싸리문을 향해 열려있었다. 맨 먼저 집을 지키던 강아지가 짖고 얼마 뒤 우르르 가족들이 들이닥치면 꽉 찬 보름달만큼 풍성한 추석이 또 정월 대보름처럼 넊넊한 정이 우리 집에도 넘쳐나는 것이다. 가족의 만남은 이산가족의 상봉처럼 반가움 그 이상의 설렘이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다행인 것은 돌아가시기 전 해에 동네분들에게 식사를 대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팔십을 기념한 조촐한 잔치였다. 늘 남의 집에 신세를 지던 어머니가 따듯한 밥 한 그릇을 대접하게 된 것은 내겐 큰 빚을 갚은 기분이 들었었다. 1년 뒤 어느 날 엄마는 천안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고 하루 만에 퇴원해 집에서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아프단 소식을 듣고 천안에 내려왔을 때 어머니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또  마치 당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계셨던지 "오늘 하루 내 곁에 있으면 안 되겠냐"라고  물었지만 나는 "내일 회사에 출근해야 돼서 안돼요."라고 답했는데 평생에 가장 후회되는 일 중 하나가 됐다. 

 한 번은 군대에서 막 제대한 후 어머니는 나를 의지하며 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땅 한 뙈기 없는 시골 삶은 사막보다 더 척박한 곳이었다. 그때 어머니의 제의를 뿌리쳤고, 또 마지막 임종 때 어머니 곁을 지키지 못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어머니 죄송해요. 제가 그때 왜 그랬을까요."라며 죄송스러운 마음을 표하곤 한다. 

 95년도 8월 22일(음)은 날씨가 제법 추웠다. 윤달이 낀 늦가을이었다. 어머니는 남들이 대문 밖에 늘어선 조화를 부러워했다. "잘난 자식이 있어야 화환이 나레비를 설텐데." 하시며 은근 당신의 장례식이 썰렁하지 않길 바랐다. 먼곳을 떠나기 전 당신의 죽음이 안타까워 찾은 이웃에게 요구르트 한 개씩 나눠주라고 당부하는 어머니의 세심한 배려가 기억에 남는다. 북망산천을 바라보며 당신을 맞으러 온 사자의 마차가 앞산에 당도한 양 하염없이 바라보던 시선도 역력하다.  

 어머니는 그날 평온한 중에 잠자듯 운명하셨다. 그리고 아버지 때처럼 교회에서 하얀 장미꽃으로 어머니의 재궁을 덮어주었다. 어머니의 관도 옻칠을 한 오동나무 관을 썼다. 그리고 벌레가 끼는 것이 싫다고 하신 어머니는 석관에 백회를 뿌려 뱀이 드나드는 것을 막아달라고 해서, 말씀대로 석관에 백회를 뿌린 후 입관을 했다. 

 집 앞에 빼곡히는 아니어도 당신이 바라던 화환도 제법 놓였다. 그리고 상여가 마을 어귀를 벗어 날 무렵 하늘에서 함박눈이 쏟아져 내렸다. 눈이 내리기엔 이른 때 당신의 가는 길을 환하게 밝혀준 눈꽃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비록 이 땅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로 생이 끝날 그 순간까지 살았지만 선함을 간직했던 두 분을 천국에서 따듯하게 맞이하는 환영의 나팔이라고 생각한다. 함박눈이 내리면 부모님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