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인연을 품은 번뇌의 속성(屬性)들
기혼자 중에 부부의 날을 특별하게 보내는 사람이 있을지 궁금하다. 아니 부부의 날이 언젠가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달력에 보면 5월 21일에 부부의 날이란 표시가 있다. 부부의 날은 1995년 민간단체인 "부부의 날 위원회"가 발족해서 부부의 평등과 민주적 부부 문화를 위한 관련 행사를 진행하면서 2001년 청원을 하게 됐고 2007년 5월 7일 법정기념일이 됐다고 한다.
둘이 하나가 되는 날이라고 하니 마치 이날이 견우직녀처럼 오작교 대신 침대에서 만나야 될 것 같은 외설스러운 생각을 갖게 된다. 하지만 부부의 날을 의식하고 기념일을 챙기는 기혼자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나부터도 이날을 특별히 챙겨본 기억이 없다. 어제가 때마침 부부의 날이었지만 아내를 집에 홀로 두고 친구를 만나러 외출을 했다.
일산에서 영등포의 심리적 거리는 꽤 멀다. 큰 맘을 먹어야 갈 수 있다. 물론 오늘 만날 친구들도 수원에서 영등포를 와야 한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집 밖을 나설 때 느껴지는 거리에 대한 피로감이다. 떠나기 전부터 돌아올 생각이 앞선다. 특히 술자리를 할 경우 걱정스러운 것은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기절하듯 졸다 보면 하차할 역을 지나치기 일쑤다.
최근 직장을 잃고 실의에 빠져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 발길이 평소보다 더 무겁다. 이 친구는 건설감리 쪽에서 지금껏 일해왔는데 워낙 꼼꼼해서 까다롭다는 관공사 일을 도맡아 해왔다. 그런데 작년에 맡은 군산의 세무서 건축 현장은 간척 사업을 한 매립지라서 애초 설계 시 적용한 기초공사 비용보다 많은 비용이 들어가게 됐는데 앙심을 품은 시행사 직원이 점심식사 때 반주를 한 것을 문제삼아 민원을 넣었고 친구는 결국 회사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게돼 공사를 마무리 짓지 못한 채 불명예스럽게 쫒겨나고 말았다.
대학생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난 이 친구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술잔 속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당에서 만난 아내는 두 살 연상으로 누나처럼 따르다 연인으로 발전했고 대책 없는 불장난에 첫 딸을 임신하게 되면서 대학을 다니던 중, 학교 근처에 단칸방을 얻어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이 친구의 어머니는 아들을 금쪽같이 생각했는데 지금의 아내가 아들의 앞길을 망친다고 생각해서 며느리를 구박(驅迫)했다.
완고(頑固)한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술로 마음을 달랜 것이 거의 40년 세월이 흘렀다. 이 친구의 얼굴은 살은 하나 없고 거죽만 남아있는 반 해골 상태다. 이십여 년 전에 아는 친구의 빚보증을 잘못 서 아파트를 날린 후 지금까지 그 빚구덩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최근에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 통보를 받고 난 후부턴 술병을 입에 물고 사는 것이다. 친구의 목소리는 늘 술에 전 상태다. 술을 마시더라도 정도껏 마시라고 말하면" 인생 뭐 있냐?"라고 말하는데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오는 목소리엔 고독감이 짙게 베어나곤 했다.
이 친구의 아내는 20년 전부터 시댁과 왕래를 끊고 산다고 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미루어 짐작할 때 친구가 빚보증을 잘못 서서 아파트를 날릴 때 힘이 돼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과 시부모의 냉대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아버지는 미수(米壽)를 넘어 올해 구십을 맞았다고 한다. 부모님 뒷수발을 들어야 하는 것도 큰일인데 가정에서 아내와는 소 닭 보듯 살고 있다.
또 다른 친구는 요즘 정년을 일 년 앞두고 자연인을 꿈꾸고 있다. 연금공단 공채 1기로 입사해서 다닐 무렵 아내가 하던 사업이 대박 나면서 셧더맨이 된 후 인생의 황금기를 맞은 듯했다. 하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이 화를 불렀고 쫄딱 망했다. 그 후 부동산에 희망을 걸었지만 그마저 안되고 가세가 기운 후 2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싸움을 하며 살았는데 아내가 미워서 죽을 지경 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종교 서적을 읽으며 마음을 달래던 중 깨우친 것은 욕심이 번뇌를 낳았고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이 악귀가 돼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후 몇 년간 마음공부를 하면서 모든 것을 내려 놓으니 아내가 예뻐 보이기 시작하더란 말을 했다.
실의에 빠져 있는 친구에게 술을 적당히 마시라는 부탁을 하면서 헤어진 뒤 전철을 기다리는 중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가 전화를 해달라는 문자였다. 이 친구는 요즘 아내의 의부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아내에게 모든 걸 맡겨두고 밖으로 나돌다 일생일대 커다란 복병을 만나고 말았다. 아마 어제도 직장에 들이닥쳐 뒤집고 돌아간 모양이다. 남들과 있거나 자식 앞에선 아무런 내색을 않다가 둘이 있을 때 불쑥불쑥 남편을 의심하고 거의 확증적인 것처럼 몰아세워 미칠 지경이라고 한다. 함께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라고 권했지만 아내는 그런 말을 꺼낼 때마다 불같이 화를 내서 치료를 받아볼 엄두도 못 낸다고 했다.
이들 세명 중 한 친구는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은 뒤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그러나 두 친구는 번뇌 속에서 아직도 탈출구를 찾지 못한 상태다. 건설감리 업에 종사하던 친구는 공사 현장에 거처를 두고 한 달에 한 두 번 집에 가곤 했는데 가도 아내는 딸네 집에 가서 손주를 본다며 거리를 두고 사는 무늬만 부부다. 그 친구의 아내 마음도 이해는 된다. 가정보다 친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보증을 서준 뒤 찾아온 가정 경제의 붕괴, 노후에 머무를 집 한 채 없는 막막함이 모든 것을 외면하고 싶은 심경일 것이다.
또 다른 친구도 역시 건설 시공 쪽에서 일하는데 아내에게 모든 것을 떠맡기고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면서 아내가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을 몰랐다. 안타까운 것은 이 친구도 자기 나름대론 가정에 소홀함이 없도록 노력해 왔고 자녀들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었다. 문제는 아내의 속이 병들어 가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기 방식과 틀에 맞춰 따르고 움직이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또 남편은 지나치게 가부장적으로 처가와는 멀리하려 했는데 반면 아내는 힘든 시댁과 잘 지내려는 강박을 지니며 살아야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두 친구의 부모는 아들에 대한 유착관계가 보통 이상이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결혼을 한 후엔 유착관계를 끊는 것이 중요한데 지속적으로 그 관계를 유지하려 하면서 아내와 부모 사이에서 두 친구는 가정을 바로 세우는 것을 실패한 것이다. 다시 말해 독립된 가정을 완성하지 못해서 벌어진 사태다. 결혼을 한다 것은 새로운 가정이 생겨나는 것이고 모든 것은 가정 내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첫 번째가 부모와의 유착관계를 끊는 것이고 경제적 자립과 함께 부부가 미래의 꿈을 공유해야 한다.
아내가 남편에 대한 신뢰감이 줄어들고 미래에 대한 희망의 등불이 꺼질 때 존경심도 함께 사라지게 되고 가정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남자는 아내가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되어야 하고 위난이 닥쳐올 땐 그 위난에서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가정이 건강하려면 부부간의 교감능력이 중요하다. 나의 경우 결혼 초기 장모의 간섭이 자주 있었고 그때마다 아내가 내편이 돼주었기 때문에 장모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태아가 자궁에서 탯줄로부터 영양분을 받을 땐 오롯이 엄마에게 기생한다. 십 개월 후 아기가 태어날 때 탯줄은 끊어진다. 이 시기가 바로 어머니로부터 1차적 독립기다. 눈도 뜨지 않은 아기는 본능적으로 엄마 품을 파고든다. 모유를 통해 기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2년을 넘게 되면 아기는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 손에 수저를 쥔다. 이 시기가 2차적인 독립기다. 이때가 되면 기다, 서다 하기 시작하고 3년이 되면 홀로 서서 걷게 된다. 과거 부모가 죽으면 삼 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고, 집 안에 상식(上食)을 올리는 것은 부모에게 의탁했던 삼 년을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아이가 자라서 성년이 되면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 스스로 살 계책을 마련하게 된다. 결혼을 하는 것은 부모와 자식 간 보이지 않는 탯줄을 끊는 것으로 엄밀히 따지면 남과 남이 되는 의식이다. 탯줄이 끊기지 않은 부부는 미생이 된 채 불안한 관계를 유지하다 결국 종국엔 파국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동물 세계에서 성체가 된 자식을 내 쫓을 때 보면 냉혹하다. 포육기(哺育期)엔 물고 빨던 자식을 성체가 되면 엄혹(嚴酷)하게 내쫓는다. 그리고 둘은 대자연 속에서 먹이를 놓고 힘을 겨루는 경쟁관계로 바뀌게 된다.
결혼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여가 다름을 인정하면서 좋은 것은 발전시키고, 나쁜 것은 과감하게 정리하는 가운데 새로운 가풍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부부는 서로를 지켜주고 두 사람만의 가정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식습관, 생활방식, 기호식품 등 모든 것이 다를 수 있다. 부부가 된다는 것은 나의 것을 우리 것으로 바꿔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인 것은 참고 견뎌내는 인내와 나를 버리고 우리 것을 얻으려는 용기다. 때론 입맛도 바꿔야 하고 좋아했던 취미도 버려야 한다. 그것이 둘이 하나가 되는 과정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