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불이야 ! 불이야!

해암 송구호 2019. 3. 12. 05:35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 몰래 빼돌린 불은 인류문명의 시작을 알리는 효시(嚆矢)였다. 가장 커다란 변화 중 하나가 섭생이다. 생식을 하던 인간이 화식을 하게 되면서 구강구조까지 변하게 됐다. 또 불의 발견을 통해 생산 활동이 늘어나게 되면서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고 추위에 맞설 수 있게 되면서 주거문화가 바뀌어 정착생활이 가능하게 됐다. 불은 인류문명의 진보를 견인해온 것이다.

불은 토템(totem)신앙과 종교의 숭배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이집트의 태양숭배는 대표적인 예이다. 또 가톨릭교에서 피우는 촛불은 번제(燔祭)의식의 변화된 형태다. 우리나라 토속신앙에도 ‘부뚜막 신’을 믿는 풍속이 있는데 만약 불씨를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여겼었다. 불은 종교적 모티브를 제공한 신앙의 어머니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불장난하면 오줌 싼다.”는 말을 한다. 화재 위험과 재난을 우회적으로 알려주기 위한 지혜다. 불은 양날의 검처럼 유익함을 주기도 하지만 잘못 사용하게 되면 소중한 재산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어릴 때 호기심과 철모름이 합쳐지면 종종 대형 사고를 친다. 나는 대여섯 살 때쯤 불장난으로 이웃집 헛간을 태웠던 적이 있다.

도외지에 살던 내 또래의 친구가 외갓집에 놀러왔는데 둘은 바로 친구가 됐고, 소꿉장난을 하며 놀던 중 밥을 짓겠다며 헛간에 쌓아 놓은 마른나무 더미에 성냥불을 그었는데, 작은 불씨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삽시간에 헛간 지붕 위로 번져갔다. 동네 어른들이 양동이를 들고 나와 불을 끄긴 했지만 헛간은 다 타서 쓸 수 없게 됐다. 나의 불장난으로 아버지는 못 쓰게 된 헛간을 새로 지어주느라 엄청 고생했다. 농한기 때 가족들과 함께 불에 타버린 남의집 헛간을 지어주느라 고생했던 아버지의 작은 어깨가 생각난다. 

겨울이 오면 논에 물을 가두고, 얼음지치기를 하며 논다. 어릴 때는 양쪽에 날이 있는 썰매를 타지만 중학생쯤 되면 외발 썰매를 타는데 날이 중앙에 있어 균형 잡기가 영 쉽지 않다. 처음 배우기는 어렵지만 서서 타기 때문에 스케이트 못지않은 스릴을 즐길 수 있다. 빙판은 날씨가 추워도 얼음이 얇게 언 숨구멍이 있다. 얼음지치기를 하다 보면 그곳에 빠져 옷이 젖을 때가 있는데, 짧은 해가 아쉬워 모닥불을 피워 놓고 젖은 옷을 입은 채 말리곤 했다. 물에 빠지면 메기를 잡았다고 말했는 데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뚝방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젖은 옷을 말리던 개구장이 친구들이 생각난다. 

아궁이는 불이 자유롭게 춤출 수 있는 공간이다. 가을이 되면 아카시아 나무를 저며서 땔감으로 쌓아 놓는다. 그리고 한겨울 아궁이에 넣고 불을 땐다. 아카시아 나무는 가시가 있어 다루기 쉽지 않지만 불이 붙고 타기 시작하면 화력도 좋고 나무에서 나는 독특한 향기가 중독성을 지녀 겨울이 되면 아궁이 앞으로 끌어들이곤 한다. 달궈진 아궁이에 시큼한 냄새가 나는 깍두기를 넣어 끓이는 청국장은 한겨울의 향기를 물씬 풍겨나게 한다. 

  겨울철 등교 때는 장작을 한 움큼씩 새끼줄에 묶어 들고 갔다. 난로불을 피우기 위해서다. 난로에 불이 붙으면 학교에서 나눠준 조개탄을 넣는데 메케하고 매운 연기가 교실 안에 꽉 차오른다. 조개탄에 불이 붙으면 화력이 좋아 금새 교실 안은 훈훈해 진다. 3교시가 끝날무렵이면 점심 도시락을 난로위에 올려놓는다. 개중(個中)엔 볶음밥을 만들어 올리는 경우도 있는 데, 특히 김치 볶음밥의 경우 냄새가 회를 동하게 한다.  

 겨울이 되면 난로에 가까이 다가서게 되는 것은 불이 품고 있는 따듯한 품성 때문일 것이다. 불은 따듯함도 품고 있지만 사나움도 함께 지니고 있다. 불은 인간의 마음을 담은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