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동산 언덕 위 소나무
내가 태어나 자랐던 집 뒤엔 장독대와 함께 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리고 집과 도로를 구분짓는 울타리로 노간주나무가 심겨져 있었다. 노간주나무는 가시가 있어, 외부인의 출입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울의 역할을 한다. 대부분 흙담을 쌓거나 돌담을 쌓는데 비해 우리집은 노간주나무로 울타리를 대신해서 궁색한 형편을 드러내는 것 같아 창피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안팎의 경계가 모호해 개와 고양이들이 제집 드나들 듯 들락날락 했고, 텃새들의 사랑방이 되곤 했다. 70년대 초 새마을 운동으로 초가지붕을 함석으로 바꾸기 전까지는 참새들의 낙원이었다. 울타리에 떼지어 앉아 수다를 떨기도 하고, 겨울엔 초가지붕에 둥지를 틀고 잠을 자곤 했다.
감나무는 추석이 가까워질 무렵이면 색이 선홍빛을 띠면서 익어간다. 이 무렵 새나 곤충들이 설익은 열매를 쪼아 놓거나 갉아먹으면 계절의 시계를 거슬러 농익게 돼 맛있는 연시가 된다.
감이 익어갈 무렵, 뒤뜰은 간식 창고로 변한다. 밖에서 한참을 뛰놀다가 뒤꼍으로 가, 대나무 장대로 연시를 따먹는데 그 맛이 일품이었다.
한 겨울엔 어머니가 새벽 교회를 다녀와, 뒤뜰로 가서 홍시 하나를 잠자는 내 머리맡에 놓아두곤 했다. 가을에 따서 장독에 넣어 둔, 감은 얼면서 익어 홍시가 된다. 겉은 쭈굴쭈굴해서 밉지만, 껍질을 벗겨내면 속은 선홍색 빛을 품은 맛있는 홍시다. 어머니가 새벽 기도를 마치고 들어오는 것은 잠을 자다가도 느낄 수 있는데, 잠도 깨울 만큼 찬바람이 어머니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 때가 새벽 4시30분 쯤이다. 어머니의 하루 일과는 이 때부터 시작 된다. 사랑채에서 쇠죽을 끓여 짐승의 먹이를 준 다음, 아침밥을 짓는다. 농한기엔 가마니, 새끼꼬기나 망태를 삼는다. 농번기엔 해가 뜨기도 전에 들에 나가 논, 밭 일을 했다.
살구꽃이 필 무렵이면 산과 들에 봄을 알리는 꽃들이 하나 둘 피어난다. 뒷동산에 흔하게 피던 할미꽃은 꽃잎이 겉은 자주색과 속은 흰색을 띤다. 솜털이 보송보송해서 어린아이의 손등처럼 보드랍다. 고개숙인 모습은 시중드는 하녀처럼 보이지만 자주색 꽃잎은 기품이 있다. 실제로 로마시대 때, 황제는 자주색 망토를 입었다. 옛날엔 옷감을 자주색으로 염색하는 것이 까다로워서 귀한 색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뒷동산은 우리들의 놀이동산이었다. 겨울엔 비료부대에 짚을 넣고 미끄럼을 탔다. 그리고 새싹이 움트는 봄이면 구루마를 만들어 타고 논다. 사실 구루마는 비표준어다.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어 15cm 두께로 자른 뒤 중심에 구멍을 파고 널판지와 연결된 축에 끼우는데 뒷부분은 고정이 돼 있지만 앞부분은 조종을 하도록 좌우로 움직일 수 있다. 앞바퀴에 새끼를 묶어 조종을 하거나 중심에 티자 나무를 이용해 조정하는데 비탈길을 쏜살같이 내려가는 스릴을 만끽한다.
오월이면 살구가 열매를 맺고 익어간다. 옆집에 살구나무는 가지가 휠 정도로 많이 열리는데 노랗게 익은 살구를 먹어 본 사람이면 살구란 말만 들어도 침샘이 자극된다. 삼국지에서 조조는 패잔병을 이끌고 갈 때, 굶주리고 지친 병사들에게 "저 언덕 너머에 살구가 있다."며 희망을 심어줬다고 한다. 옆집 살구나무는 바람이 불 때마다 한 움쿰씩 떨어지기 때문에 아침에 가 보면 영락 없이 맛있는 살구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널다리를 건너, 낙과를 주워먹는 것도 유년시절의 추억이다.
어릴 때 놀이터 중 한 곳이 우리 뒷집 마당이다. 두 집의 마당이 길과 연결되어 있어 놀기에 안성맞춤 이었다. 경사진 언덕에 집을 지어서 아래 윗집 마당은 약간 층져 있어, 뛰놀다 보면 넘어지기도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놀았다. 가정에 TV가 보급되지 않았던 때라, 뛰노는 것이 유일한 낙(樂)이었다. 자치기, 팽이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말뚝박기 등, 놀이가 다양했고, 놀다 보면 때를 놓치기 일쑤였는데, 어머니들이 부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땅거미가 밀려와 어스름해지면 이내 파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그 중, 한 친구의 어머니는 자식을 부를 때마다 "빌어먹을 새끼, 두 다리 똑 부러져라!"라는 악담(惡談)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말의 씨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된 사건은 그 친구가 중학교 들어간 후 일어났다.
초등교육을 마친 후 우리는 천안시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했다. 집에서 5리를 걸어가 소정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등교를 했다. 통근 열차는 속도가 느려서 완행열차(緩行列車)라고 불렀다. 열차가 완전히 정차하기 전, 누가 빨리 뛰어내리는가, 시합을 하면서 담력을 과시하던 중, 한 친구가 열차 밑으로 빨려들어가는 사고가 났다. 불행히도 그 친구의 두 다리는 열차 바퀴에 잘려버린 상태였다. 역무원들이 서둘러 병원으로 후송조치를 해, 목숨은 건졌지만 두 다리를 영영 잃고 말았다. 그후 이 친구는 학교를 자퇴하고 서울로 올라가 전철에서 구걸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는데 이십 대 초반 무렵,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 뒷동산 언덕 위에 서 있는 소나무에 목매달아 자살하고 말았다. 어릴 적에 우리가 함께 뛰놀던 동산에서 그 친구는 우리 곁을 영영 떠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