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후기
따듯한 햇볕이 예술가의 끼를 깨우는 남프랑스
해암 송구호
2018. 5. 25. 12:06
누구나 여행을 위해 짐을 꾸리는 그 순간부터, 마음은 이미 구름 위를 날아가듯 들뜨게 마련이다. 온 몸은 솜처럼 가벼워지고 평소에 무감각했던 호르몬이 활성화되면서 입가의 주름들을 잡아당겨 순식간에 추켜올리니 누가 봐도 기분이 최고라는 사실을 단박에 눈치 챌 수 있다. 일상의 변화는 삶에 있어 재충전이자 활력소로 작용할 때가 있다. 특히 쉼을 위해 준비한 해외여행은 호기심과 함께 설렘으로 가슴을 뛰게 해 피 끓는 청춘을 경험하게 한다.
내가 유럽여행을 시작한 것도 벌써 햇수로 5년째다. 로마역사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면서, 로마의 유적에 호기심이 발동해 해마다 유럽여행을 떠났었다.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기도 했지만, 놀고 먹는 것에 비싼 돈을 들이지 않아야 한다는 평소 생각으로 비수기를 골라 출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렇다보니 직항로선의 항공기보다 다른 나라를 경유하는 비행기를 주로 이용하게 되었다. 처음엔 비행기를 갈아타며 여행할 수 있다는 점이 내겐 좋았다. 그런 환상은 올 해로 끝인가 보다. 기내에서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유독(唯獨) 길었고 여행 후, 감내해야 한 여독(旅毒)이 극심했기 때문에 체공시간이 길다는 것만으로도 부담으로 다가오니 말이다.
이번 여행은 남프랑스, 모나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다. 2년 전 스페인은 다녀왔기 때문에 남프랑스, 모나코와 포르투갈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일정표를 들여다보다 문득 이번 여행의 테마가 화가들과 그림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프랑스에서 활동했던 화가들의 무대와 우리의 여행 일정표가 맞아 떨어졌다. 남프랑스 아를엔 고흐와 고갱의 발자취가 남아있고, 생 폴 드 방스엔 샤갈의 그림 속 풍경과 그의 무덤이 있다. 액상 프로방스에는 폴 세잔의 아뜨리에(atelier)와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승리 산이 있다. 또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는 카롤루스 4세의 가족, 옷 벗은 마하, 옷 입은 마하, 1808년5월3일 의 처형 등을 그린 고야가 있다. 고흐, 고갱, 고야 등 고씨 삼 형제의 이야기가 이번 여행의 꼭지를 엮어갈 주제가 될 것 같다.
두바이는 이번이 세 번째다. 관광코스도 똑같고 점심 때 먹는 갈비탕도 변함 없이 똑같다. 그리고 두바이 몰에서 어슬렁 거리다 환승할 비행기 시간에 맞춰 공항에 가는 것이 코스처럼 되어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아부다비에 있는 도시를 관광할 기회가 주어졌다. 흔히 우리에게 중동의 아랍 에미레이트 연합 7개국 중 두바이가 잘사는 나라로 인식돼 있는데 속 사정을 들여다보면 두바이 왕은 재주를 부리는 곰이고 돈버는 것은 왕서방인 아부다비의 왕이다. 2008년 두바이가 국가부도 상태에 빠졌을 때 중동의 실질적 재력가인 아부다비에서 부도사태를 막아주게 되었고 2012년 아랍의 봄이라고 하는 자유물결이 중동에 불 때 아이로니컬하게도 두바이는 되 살아났다고 한다. 두바이나 모나코는 부자들이 돈을 예치하고 운영하기 편리한 구조로 되어 있어 아랍에서 불었던 자유화 바람에 위기를 느낀 아랍 부호들이 두바이로 돈을 옮겨 오면서 서서히 두바이를 떠났던 바이어들과 투자자들이 돌아와 안정세를 유지하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아부다비는 사막을 녹지로 조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도심 전체를 녹색으로 바꾼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돈과 노력이 필요하다.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가는 프라스틱관이 혈관처럼 도심 곳곳에 뻗어 있고 나무와 풀 한포기에 관이 닿지 않으면 땅은 불모지대로 변하게 돼, 생명체는 말라죽게 된다. 여름 한 낯 더위가 50~60도를 넘나들고, 비가 일년에 고작 서너 차례 올똥말똥하니 생명체가 살래도 살 수 있는 환경이 못 된다. 미물의 존재가 하찮아도 생명을 나누는 사슬 속에서 누군가에게는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다. 아부다비에 녹지사업이 성공을 이룬 후에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도심에 새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새가 노래하고 매미들이 울어대는 우리나라는 지상 천국이다. 그래도 숲은 존재하는 나라 아부다비엔 새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그늘, 야자수가 도심을 둘러싸고 있어 이 곳이 사막이란 사실을 일 순간 잊게 한다. 담수시설을 만든 두산의 기술력이 중동의 모래바람을 잠재우는 일등공신이라고 하니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나, 대한민국 사람이야 !"
남프랑스와 맞닿아 있는 모나코는 바티칸 시국에 이어 두 번째로 작은 나라다. 인구 3만에 땅은 2㎢이며 세금이 없다. 국가의 세수원은 카지노와 관광이며 매년 5월이면 F-1경기가 열리는데 우리가 간 다음날부터 모든 차량의 출입을 막는다고 한다. F-1 축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모나코의 땅 값은 한 평에 3억을 넘는다고 한다. 허름한 옷차림을 한 마을 주민들이 공원에서 삼삼오오 햇볕을 쬐고 있는데 건물 한 채를 가지고 있어도 대단한 재력가인 셈이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모로코와 단어가 비슷해 여행지에 와서야 자신의 선택지가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모나코의 절경과 세계의 부호들이 몰려드는 데는 따듯한 기후도 한 몫을 한다. 지중해의 강렬한 태양과 풍부한 먹거리 그리고 부자들의 호주머니를 지켜주는 철통같은 치안과 근접 경호로 안전한 나라. 지상낙원 모나코는 부자들이 몰려드는 황금어장이다. 돈 많은 부호들의 발길은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정작 그들을 수용할 땅이 없어 고민인 모나코는 급기야 바다를 메워 육지를 만드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모나코에서는 땅이 곧 황금이기 때문이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상품 중 하나가 향수다. 에즈는 향수를 생산하는 공장이 있다. 꽃동네에서 꽃의 향기를 모아 세계적인 향수를 만드는 지역으로 지금의 명성을 얻었다. 우리가 방문한 날이 휴일이라 공장 안은 썰렁했다. 하지만 다음날 영국 황태자의 방문이 계획 돼 있어 공장을 관리하는 직원들은 손님 맞을 준비로 분주했다. 공장의 홍보 책임자가 생산 과정을 설명해주면서 꽃에서 축출한 향수 원액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라 해서 맡으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역한 냄새가 났다. 사향의 원액이 풍기는 고약함처럼 농축된 물질에서는 전혀 다른 냄새가 난다는 점이 신기했다.
남프랑스의 햇볕을 사랑하는 유럽인들은 니스로 다 모여든 듯하다. 주변에 누구를 의식하지 않고 남녀가 모래사장에 배를 깔고 누워서 일광욕을 하느라 바쁘다. 지중해의 5월, 태양 볕의 세기는 난롯불 가까이에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 느낄 수 있는 힘의 세기와 비슷했다. 우리 일행 중 젊은 층의 가족이 여행을 왔다. 13세 초등학생이 공항에서 부모와 동행할 때, 벌써 방학은 아닐 테고 가족이 이민 가는 것 같지는 않아 고개를 갸우뚱했었는데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가는 때를 맞춰 가족이 여행을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이가 토하고 밥을 못 먹더니 나중엔 몸이 엿가락처럼 늘어져 아버지가 등에 들춰 업고 여행을 하는 것이 불안 불안했는데, 결국 4일차 한 밤중에 숙소에서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고, 맹장염으로 당장 수술을 해야할 상황에 놓였다. 인솔자도 아침까지 까마득히 모르다가 그 소식을 듣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얌전한 현지 가이드가 밤새 이 일을 처리하느라 동분서주하며 바쁘게 보내느라 밤을 꼴딱 샜다고 한다. 밤잠이 없는 어른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뒷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심각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남프랑스는 휴양도시로서 나름의 의미 있는 행사가 열리는 곳이 많다. 깐느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71회 깐느 영화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레드카펫이 깔리고 세계적인 영화배우들이 이곳을 찾게 된다며 현지가이드는 열변을 토한다. 깐느 영화제가 열릴 곳은 해변가로 고급요트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벌써 세계 언론사 기자들이 좋은 자리를 두고 밤을 새우고 있었다. 길 건너에 있는시청 앞 광장에서는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명품 옷과 가방을 비롯 액세서리가 시장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명품이 어떤 것인지에 관심을 두고 살지 않아서 인지 별로 마음에 와닿지 않아, 점심을 먹기 위해 시청 옆에 즐비하게 늘어선 음식점 중 피자가게에 들러 지배인에게 제일 맛있는 것으로 추천해달라고 해, 그 것을 먹으면서 자유 시간을 여유롭게 보냈다. 뒷이야기를 들으니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 수상후보로 올라 경쟁을 벌여 한국언론에서도 깐느 영화제가 자주 언론에서 다뤄졌던 모양이다.
중간 중간 인솔자가 이동 간에 아파서 여행을 포기한 민성이네 가족 이야기를 전해줬다. 민성이가 병원에 가던 날, 인솔자는 우리들에게 집에서 가져온 컵라면이나 음식이 있으면 십시일반 보태달라는 말을 했고 일행들은 들고왔던 음식을 내놓았다. 우리는 무조건 현지 식으로 해결한다는 신념으로 여행 출발 때 아무 것도 싸들고 간 것이 없어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여간 처음에 갔던 병원에서 입원수속을 밟고 수술을 하려는데 집도할 의사가 없다며 다른 병원으로 이송해야한다고 해서 옮겼고 다시 처음부터 검사를 해서 결국 28시간 만에 수술실로 들어갔다는 이야기였다.
3일 후 퇴원 한 민성이네는 파리까지 가서 국내 항공기를 타고 무사히 돌아왔는데 문제는 병원비가 7백만 원이 넘게 나왔고 숙박비에 편도 항공료가 5백이 넘게 나왔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으니 민성이는 인공수정을 통해 부부가 8년만에 어렵게 얻은 귀한 아들 이었다. 단순히 체한 줄 알고 소화제를 찾아 나섰던 경솔함은 지나 놓고 보니, 하마터면 애 잡을 뻔 했다. 아이의 엄마가 약사였다는 말에 더욱 소름이 돋는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정작 그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상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였었다. 아이는 몸이 축 늘어진 상태로 아버지의 등에 업혀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사원의 계단을 오르는데 눈의 동공은 반쯤 풀려 있고, 맥이 풀어진상태로 여행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병명이 확실해져서 천만 다행이다.
다른 때보다 이번 여행은 무리가 됐던 게 틀림 없다. 체공시간이 어느 때보다 길었다. 나도 여행 후, 돌아오던 길에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한기를 느끼면서 고열이 나고 끙끙 앓았는데 처음엔 메르스가 아닌가 걱정했다. 공항 직원도 체온이 높다며 의심하는 표정을 지어 순간 긴장했었다.
패키지여행의 장단점은 수박 겉핥기식 여행이다. 짧은 시간에 광범위한 곳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여행의 장점이다. 그러나 지역 간 이동 시간이 길고, 숨 가쁘게 움직여야 하다 보니 화장실 갈 때와 관광지 둘러볼 때 빼놓고는 대부분 시간을 버스에서 보내야 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창밖의 풍경을 보는 것에 만족하든가 아님 가끔씩 틀어주는 비디오를 감상하면서 여행의 2/3를 보내게 된다. 한계점이 극명하다보니 젊은 사람들은 선호하지 않는다. 외국어를 모르는 노년층이 대부분으로 인솔자들도 여행객의 심기관리에 치중하는 것 같다. 여행 스케줄은 뻔하고, 그들의 상품에 대한 조악성이 표면으로 드러나면 골치 아픈 일들이 벌어질 테니 사전 입막음은 필수다. 이번 인솔자는 특히 자기 디스를 통해 일행을 다독이려는 모습이 눈에 띤다. 슬랩스틱 코미디의 거장 찰리 체플린처럼, 자기를 웃음거리의 소재로 삼으니 어른들은 좋다고 연신 웃는다. 그렇다보니 여행의 질은 불만 사항이 되질 않는다. 어차피 내일이면 잊혀질 추억들이니, 그 순간이 즐겁고 기쁘면 그만이다.
생 폴 드 방스는 샤갈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멀리서 보니 산 중턱을 깎아서 도시를 세운 것처럼 도드라져 있다. 적의 침략으로부터 도시를 지키는데 용이하도록 설계된 것으로 보여 진다. 골목도 병사 한 두 명이 교차하기 힘들 정도로 좁았다. 골목엔 기념품 상이 지나는 행인의 발길을 붙잡는다. 샤갈의 판화보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해바라기 등의 그림이 새겨진 소품들이 팔려나갔다. 나도 여행 중 입을 티셔츠를 샀는데 니스와 깐느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샤갈은 유태계 러시아인으로 프랑스 생 폴 드 방스를 사랑하며 마지막 생을 이곳에서 보냈고 그의 무덤이 이 곳 공동묘지에 있다. 그의 무덤은 석관 위에 돌을 올려놓아 다른 무덤과 구별 된다. 유대인들이 무덤을 찾을 때 돌을 하나씩 올려놓는 관습이 있어, 그가 유대인이란 것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샤갈은 98세를 살았다. 판화로 시작해서 1958년 이후로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현대작품에서 드물게 시각적 은유를, 내면의 시적 호소력을 이용하여 상징적이고 미학적인 형식 요소들과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이미지를 결합한 작품들을 많이 그렸다. 샤갈하면 이중섭의 은박지화가 생각난다. 판 화가였던 점과 사실화보다 이미지를 강조하는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중세도시 아비뇽은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는 도시다. 카놋사의 굴욕과 아비뇽 유수는 중세시대 역사의 변곡점이기 때문에 자주 등장한다. 왕권과 교황권의 싸움으로 인식되는 두 사건은 중세를 지배해왔던 종교 세력이 약화되고 왕이 중앙집권을 강화해 전국을 지배하는 시기다. 교황권이 강할 때 카놋사의 굴욕이 일어났다면 왕권이 강화 된 후 일어난 사건이 바로 아비뇽 유수다. 1095년 우르바노 2세가 십자군 전쟁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주장한 후 2백년 가까이 가톨릭교를 중심으로 유럽사회는 십자군 전쟁에 매몰됐다. 결국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면서 가톨릭의 중심지 로마교황청은 기능을 상실하고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가는 수모를 겪게 되는 것이 바로 아비뇽 유수다. 기독교가 실권하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권력의 축이 왕권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교황이 볼모로 잡혀 살아야 했던 시기다. 아비뇽 교황청은 감옥과 같다. 화려함은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창살이 당시 교황이 연금 상태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국경으로 북방에 론 강, 도나우 강과 남방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을 경계로 삼았다. 론 강은 호수처럼 넓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넓고 잔잔한 론 강은 고흐가 사랑한 아를을 끌어안고 흐른다. 사진을 찍을 때, 빛은 생명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그림에서도 빛은 예외가 아니다. 아를의 태양 빛은 예술가들의 캔버스에 생명을 불어 넣는 역할을 했다.
고흐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아를은 내가 남프랑스를 여행하게 된 동기부여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 했던가?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처럼 아를엔 고흐가 없었다. 그가 고갱과 함께 살았던 노란 집은 제 2차 세계 대전 때 폭파 되어 터만 남아 있고 론 강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다는 곳엔 그의 그림을 찍어 놓은 동판이 붙어있는 것이 전부다. 밤의 카페 테라스의 옛 모습도 남아있지 않았다. 주변에 들어선 상점들로 고흐가 그린 그림 속 풍경과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흐는 종교와 예술적 성향을 지닌 가풍 속에서 성장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목사였고 동생 태우는 화방을 운영했다. 다른 가족들도 종교나 화방을 운영해서 고흐가 한 때는 전도사로 일하기도 했고 화방에서 일을 한 적도 있다. 고흐는 여인들로부터 2번이나 청혼을 거절당하는 아픔을 겪는다. 한 번은 하숙집 딸에게 청혼을 했다 거절당했고 또 다른 한 번은 과부가 되어 돌아온 사촌누이에게 청혼을 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그는 화가 고갱을 만났을 때 그를 최고의 예를 갖춰 대했다. 물론 그 이면엔 그로부터 똑같은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고갱은 제가 잘나서 그렇게 대우를 받는 것으로 알았고 고흐의 존재를 무시했다. 고흐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것은 불행한 일이다. 또 경제적으로 동생 테오에게 의존해야했던 자신의 처지와 그림을 그렸지만 팔리지 않게 되면서 오는 움추러드는 마음이 그를 답답하게 했다.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가 치료를 받아야 할만큼 이미 정신적으로 황폐해져 있었고 술과 담배에 의존해 살면서 육체도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져 있었다. 넉넉하지 못한 생활비 중 화구를 사고나면 한 달에 밥을 먹은 날을 손꼽을 정도로 생계가 어려웠던 고흐는 죽음 앞에서도 동생 태오에게 짐으로 남는 것을 끝내 미안해 했다.
가난, 편견, 무시 등 가슴이 쪼그라드는 불편한 삶의 해방구로 선택한 자살은 고흐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위해 삶의 전부를 버렸다. 이미 통제가 안되는 정신세계, 망가져 버린 육체는 그에게 살아갈 이유를 갉아 먹고 있었다. 또 동생에게 매달 받는 용돈도 염치 없는 고흐에겐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림도 팔리지 않고 창고에 쌓여만 가니 더 이상 화가의 길을 걷기에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모든 안 좋은 상황들이 그의 가슴을 조여올 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현실의 절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고 리벌브 총구는 그에게 자유의 날개를 선사한 것은 아닐까? 견딜 수 없는 삶의 무게가, 그를 더욱 더 깊은 고독의 나락으로 빠트렸을 테니..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다른 지역에 비해 해발고도가 높아 기온이 서늘한 편이다. 스페인의 역사는 우리보다 더 많은 외세에게 지배를 받았고 또 다양한 민족들이 들어와 살았다. 종교의 스펙트럼도 그래서 다양했다. 한 때는 세계의 무대를 주름잡는 무적함대를 가지고 지중해와 대서양을 누비기도 했다. 오늘날의 스페인으로 탄생하는데는 가톨릭의 신앙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국토회복운동으로 불리는 독립전쟁의 기저에 가톨릭 신앙이 뿌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도 스페인 인구의 92%는 가톨릭 신자다. 물론 시류의 흐름에 따라 적(籍)만 유지한 채 1년에 한 두번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30%가 넘는다고 하니 스페인도 변하긴 많이 변했다. 스페인이 번성했던 때는 합스브르크 왕가와 신성로마제국이 합처졌던 펠레페 2세 때다. 문제는 펠레페 2세가 가톨릭 세상이란 미명(美名)하에 네덜란드와 80년 전쟁을 치르면서 국고를 탕진해 스페인제국의 화려했던 시대는 막을 내릭리게 된다. 고야는 스페인의 근대사에 등장하는 궁정화가로 당시 스페인의 아픔과 질곡의 시대를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카롤로스 4세의 가족', '옷 입입은 마야', '옷 벗은 마야' 등이 있다. 카롤로스 4세의 무능을 드러내기 위해 촛점 잃은 시선을 표현했고 국정을 왕비인 파르마 루이사와 그녀의 정부 마누엘 데 고도이에게 위임하고 사냥을 하면서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살았던 카롤 4세와 달리, 왕비는 도도한 얼굴 표정을 나타내고 있다. 또 가족사진의 구성이 어수선한 것은 집안꼴이 엉망이란 점을 은연 중 그림에서 비꼬아 표현하고 있다.
또 그의 그림에는 시대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이 그림을 통해 고스란히 묻어나는데 종교재판, 스페인 혁명에 대한 그의 시각은 날카롭다기 보다 처참함이 베어난다. 스페인은 가톨릭을 국교로 삼고 세계를 가톨릭 세상으로 만들려는 야심찬 계획 아래 종교재판이란 무서운 틀을 가져와 이교도들을 탄압했다. 이 때 가장 많이 희생된 민족이 유대인과 이슬람교를 믿던 아랍인이었다. 그들은 종교재판을 구실로 재산과 사회적적인 신분을 일거에 추락시켰는데 표면적으로는 가톨릭교로 개종시키는 것 이지만, 이들이 노리는 것은 개인의 재산과 이교도를 뿌리채 뽑는 것이다. 대부분 교활한 말재주로 올가 매면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고야의 유령"에서 부유한 상인 집안의 유대인 여성이 종교재판 과정에서 아름답던 청춘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가톨릭 사제에 의해 강제로 임신이 된 후, 정신 이상자가 된 상태에서 자신이 낳은 아이를 찾아 거리를 떠도는 모습은 처연(悽然)하다. 고야는 종교재판을 무섭게 그려냈다. 그림속에 사제단의 모습은 비열하고 추악한 혐오의 대상으로 그렸고, 형틀에서 죽어가는 이교도로 내몰린 사람들의 모습은 넋을 잃은 사람들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깡마르고 뼈만 앙상한 모습을 담고 있다. 고야는 시대의 불의에 항거한 비판자요. 계몽주의 화가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