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 8개국 여행을 시작하면서
나는 비행기 타는 것을 좋아한다. 하늘을 날아 간다는 그 자체가 가슴을 설레이게 하니 먼 유럽으로 떠나야 제맛이라 여겼다. 비행 중 제공되는 기내식도 여행의 맛을 느끼게 하는 추억의 파편이다. 몇 번 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다음 여행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버릇도 생겼다. 여행이 추억으로 남는게 아니라 진행형이 된 것이다. 이번 여행 중 만났던 60대 후반의 여성도 기내식이 그리워질 때 쯤이면 여행가방을 꺼내서 짐을 꾸린다고 했다. 여행은 누군가에게는 추억으로 남지만 그 어떤 사람에게는 사막 한 가운데서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는 나그네처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목마름을 해갈하려는 사냥꾼이 된다. 또 어떤이는 현실 속에 엉클어진 무질서와 혼돈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신을 내려놓으려고 여행을 선택할 수도 있다. 우리가 발칸 여행을 준비한 것은 아내가 36년 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후 그동안의 수고에 대한 자위와 틀에 갖혀 지내던 36년, 그 고통의 멍에를 벗어던진 후 만끽하는 자유를 오롯히 한 몸으로 느끼고자하는 데서 시작 하게 되었다.
서두에 장황하게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떠나는 여행을 예찬(禮讚)한 것도 따지고 보면 내 나름대로 육체적으로 건강에 문제가 없기에 가능한 것이었는데, 이번 여행 중 난기류를 만나 기체가 요동치고 심지어 순간적이지만 비행기가 자유낙하로 지상을 향해 뚝 떨어질 때 심쿵을 느끼면서 놀이공원에서 타지 않던 바이킹이나 드룹 리프터 또는 롤러 코스터(roller coaster)에서 느낄 공포감을 5천피트 상공에서 체험해야 하는 처지가 되니 삶보다 죽음이 더욱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키지 여행의 좌석이 그렇듯 꼬리부분에 앉아 기체의 흔들림을 몇시간 동안 오로시 느낄 때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내 기억엔 딱히 생각했던 것이 없었다. 심지어 집에 두고온 애들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 승무원의 태도가 조금이라도 이상했다면 죽음을 앞두고 한다는 마지막 회상과 염려도 했겠지만 너무 태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니 으레 이곳을 지날 때 있는 일이려니 자의(自意)하며 통증을 삭힐 때처럼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눈을 감는 순간 시골길에서 소달구지를 타고 갈 때 느끼던 진동보다 더 거칠고 격렬한 흔들림에 잠은 고사하고 정신이 생동해졌다. 진동폭이 심할 때마다 뇌속은 복잡스럽게 꿈틀댄다. '혹시 날개가 부러지면 어떡하지, 꼬리부분이 부러지지 않을까?' 온갖 상념으로 가득차다보니 비행 내내 좌불안석(坐不安席)이다. 다음날 인솔자는 더욱 끔직스런 말을 한다. 난기류 때문에 우리 뒤에 오던 비행기는 공중에서 2시간을 선회하다 회항했다는 것이다. 보통 곧바로 공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연료 때문이다. 비상 상황이면 공중에서 연료를 쏟아 버리지만 아마 그정도는 아니었을테니 2시간을 공중에서 보낸 후 착륙했던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를 태우고 간 기장의 무모함이 우리를 공포 체험 속으로 몰고 갔다고 할 수 있다. 뮌헨 공항에 도착한 것은 사선을 넘고 넘어서 였던 셈이었다.
요즘 유럽은 IS집단이 저지르는 테러로 초 비상이다. 특히 공항은 테러리스트(terrorist)들이 잠입할 수 있는 통로기 때문에 출입 절차가 까다롭다. 우리가 타고 온 비행기는 브르카와 터반을 두른 아랍인들의 국가, 아랍 에미레이트 항공이다. 유럽인들이 몸서리치는 아랍인들이다보니 공항 검색은 더욱 까다롭게 진행되었다. 출입국 심사 때 개별 인터뷰를 하니 독일어나 영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통과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次)에, 아니나 다를까 얼굴이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아랍어로 말하자 인터뷰 도중 열외시킨다. 그는 몸짓으로 연신 왜 자신을 묶어두냐고 항변하지만 그럴 때마다 얌잔히 있으라는 손짓만 한다. 독일이 만약 여행지에 포함되었다면 우리도 개별 인터뷰를 했겠지만 오스트리아를 가기 위해 경유하는 것이라서 인솔자가 대표로 설명하고 여권만 보여주는 선에서 출입국 심사대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어느 나라든 국력은 해외 여행시 공항에서 육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출입국심사 때 야박하게 굴면 굴수록 국력은 밑바닥이라고 보면 틀림 없다. 다행히 여권 심사 중 우리를 호의적으로 대하려는 모습에서 일련의 모든 긴장을 완화시켜 주었다. 독일과 우리나의 인연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1960년대 초반 차관을 빌리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가난한 나라라고 미국조차 외면했을 때 우리에게 선뜻 돈을 빌려준 나라가 독일이었다. 당시 3D 업종이던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 한다는 선제 조건이 있긴 했으나 이 조차도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겐 기회였고 수 많은 인재가 자원(自願)해서 경쟁율 또한 높았다. 1963년부터 80년까지 광부와 간호사들이 이국 땅 독일에 왔고 어렵고 힘든 과정을 극복하면서 이곳에 뿌리를 내려 살고 있다. 아마 그분들의 영향이 컷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번 여행은 인천공항에서 두바이로 간 후 뮌헨행으로 옮겨타야 하는 일정 중에서 짬을 내, 시내투어를 하려다 보니 여독(旅毒)으로 몹시지친 상태였다. 게다가 우리는 작년에 이탈리아 여행 때 이미 두바이 시내 관광을 했기 때문에 시내투어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다른 여행객들도 크게 관심이 없는 것을 보면 지친 상태의 피곤함을 극복하지 못했거나 이미 두바이 관광을 경험한 사람들일거라 지레 짐작하게 된다.
시내투어가 시작될 무렵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더니 장대같이 굵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현지 가이드가 행운을 가져다주는 반가운 비라고 말하며 분위기를 띄워보지만 반응은 냉냉했다. 돗단배 모양의 7성급 호텔인 버즈알아랍을 조망하는 쥬메이라비치에서 해변을 걷고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대여섯 명만 차에서 내릴뿐 나머지 사람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비바람이 거센데다, 어두워 사진이 제대로 찍히지 않을 것을 알기에 포기한 듯하다. 수상택시 아브라는 경유엔진을 부착한 목선으로 소음과 매연이 극심(極甚)해 토가 나올 지경이다. 또 금시장은 정기휴무로 문이 닫혀 구경도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는데 현지 가이드조차 정기 휴무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넌쎈스가 아닐 수 없다. 돌아오는 길에 우산도 없이 비를 맞아야 하는 일행들은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금시장 투어 펑크로 일정이 꼬이자 서둘러 두바이몰로 향했지만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해서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상점이 많은데다, 고가의 브렌드 상품이 진열되어 있어 무엇을 살 것도 아니다보니 일행들 대부분이 복도를 서성댄다. 이 또한 엇박자나기는 매한가지다. 작년에 다녀간 경험으로 알고 있는 폭포수 인근 커피숍에서 차 한잔 마시며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찾았지만 커피값을 현지화로 지불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해 그마저 포기하고 말았다.
딱히 할 것도 없는데 자유시간이 길게 주어질 때면 시간을 보내는 게 고역이다. 통로를 걷다 지쳐 의자에 앉으니 눈이 저절로 감기고 졸음이 쏟아져 내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연신 꾸벅거리자 멀리서 경비가 다가와 깨운다. 피곤함에 무료함까지 겹쳐 두바이몰 투어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여행 출발 전 딸과 아내가 인터넷 쇼핑을 통해 구입한 화장품을 공항 면세점 창구에서 받는데 쇼핑몰 직원이"두바이 공항에서는 우리가 구매한 물품이 액체류로 분류되며 기내반입 기준 100mg 초과시 빼앗길 수 있으니 신중하게 결정하라"고 했다. 짧은 고민 뒤 아내가 내린 결론은 빼앗기더라도 구매품을 가져가갈테니 "주세요"였다. 아내의 손에 면세품이 들려진 순간, 검색대에서 걸리면 말도 잘 통하지 않는데 실랑이 해야하는 문제와 빼앗긴 물건에 대한 미련이 남아 속앓이를 할 생각에 마음은 이미 두방맹이질이 시작 되었다.
까탈스럽다는 두바이 공항 검색대를 무사히 빠져나와 안도의 숨을 쉬는 것도 잠시 잠깐, 비행기가 이륙한 후 난기류를 만나 롤러 코스터를 타는 착각 속에서 4 시간 이상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인고(忍苦)를 거친 후 뭰헨공항에 도착했다. 두바이에서 맞은 행운의 비가 우리를 지켜줬는지 알 수 없지만, 두바이 현지 가이드의 말이 주술(呪術)처럼 뇌리를 맴돈다. 행운의 비, 행운의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