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마키아 벨리 로마사 이야기

해암 송구호 2016. 6. 14. 10:33


1. 로마란 무엇인가?

 古代 그리스 文明의 登場 : 기원전 5세기 (세계 역사의 전환점 맞아) 地中海 中心 世界歷史(서양사) 로마 출현을 계기로 "유럽 세계라는 槪念 形成.

 이탈리아 반도 : 작은 부족 로마인 활약 → 서 지중해는 세계사의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기원전 6세기 : 그리스 인근에 조차 알려지지 않음

 기원전 3세기 말 : 이탈리아 반도에서 동방으로 진출. 이어지는 200년 사이 로마 제정이라는 통치체제 확립. 헬레니즘(그리스 문명권)과 서유럽 대부분 포함한 거대한 통일제국 수립.

 로마가 어떻게 제국이 되었을까?

 기원전 2세기 : 로마의 膨脹期로 제국 성립을 지향했나? 그렇다면 그동기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무엇인가?

 카르타고와 전쟁, 그리고 지중해 패권을 장악, 로마의 전쟁은 정당한 싸움이었을까? 侵略이었나? 同盟國 防衛를 위한 受動的 움직임인가? ☜ 防衛的 帝國主義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 - 식민지 정책의 정당성에 영향

로마의 군사적 자질과 가치권 : 전쟁과 연결될 때 로마 사회의 특성, 대 제국이 성립되기 까지 끊임 없이 전쟁을 한 이유? 정당한 전쟁만 했었다면 끊임없이 싸울 일은 없었을 것이다.

로마는 왜 ! 전쟁을 계속했는가? 그들의 가치권에서 군사에 관한 것은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었다. 특히 지도층에서 두드러졌다. 뛰어난 지도자는 군사적 자질이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 로마 指導 層의 出世 過程 : 財務官(30세 전후) → 護民官 → 按察官 → 法務官

 당시 재무관 10인, 집정관 2인을 선거로 뽑았다. 자질은 군사적 재능을 높이 보았다. 로마의 관직은 군이 행정을 앞섰다. 선군정치였던 셈이다. 전쟁터는 능력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로마 사회가 풍요로울 수 있었던 것은 전쟁 승리에 따른 노예와 전리품이다. 패전국의 국민은 노예로 전락했다. 執政官은 1년의 임기를 통해 資質을 評價 받았다. 재차 관직에 就任하기 위해서 10년의 空白期가 필요했다. 名文家門의 경우도 軍事的 活躍을 하는 인재를 몇대에 걸쳐 輩出하지 못하면 지도자 그룹에서 脫落했다. 전쟁으로부터 얻는 이득은 바로 부였다. 戰利品과 勞動力(奴隸)을 얻어 豊饒를 누렸다. 

 어느 사회나 陽地가 있으면 陰地도 있는 법이다. 로마의 평민들은 경제적으로 窮乏했다. 귀족들은 평민의 困窮함을 外國 領地를 평민에 부여하는 것을 選擇했다. 에투루리아 인의 도시 베이를 共有地로 한 것이다. 

 로마 노예제 구조의 형성 : 로마의 노예(방대한 수)는 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유력자가 노동력으로 노예를 많이 사다 썼다. 전쟁 捕虜 중 몸값을 지불하지 못해 끌려온 자들을 노예로 팔려나갔다. 전쟁이 빈발해 로마 사회는 노예가 넘쳐났다. 카르타고와 전쟁 때는 남성은 모두 죽이고 여성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려나갔다. 로마의 노예는 쌌다. 반면 그리스는 비쌌다. 제국 형성기 로마의 노예는 家庭을 가질 수 없어 再生産 씨스템이 없었다. 노예가 가정을 갖기 시작 한 때는 共和政이 끝날 무렵이다.

 막스베버는 古代 世界의 沒落 要因으로 로마에 平和期로 奴隸 流入이 中斷되었기 때문에 小作制로 經濟構造가 바뀌지 않을 수 없었던 現實을 注目했다. 

 로마가 覇者로서 就한 立場 : 支配的인 政策을 취하는 일이 없고 戰爭시 軍隊를 提供하는 군사적 同盟 關係를 유지했다. 전쟁이 없을 때에는 指導 層이 누구인지 上下 층의 구분이 안됐다. 지도 층이 전쟁을 원하는 要因이 된  것 중 하나다. 


宣戰布告(벨룸 유스트 / Bellum justum)  : 神官團이 宣戰布告를 하고 유피테르에게 자신의 正當性을 말한 경우 "正當한 戰爭"으로 認定되었다.


로마 전쟁을 불러 일으키는 구조

 전쟁 시작 전 : 새점을 보는 종교행위, 정당한 전쟁이 아니면 신의 가호를 받을 수 없다는 생각.

 로마에 의존하는 국가 : 그리스인의 경우 他國에 支援을 요청하는 경우 자신들의 主權을 침해한다거나 覇權을 行事하지 않을까 두려워 하지 않았다. 로마의 位相이 오를수록 支援과 裁定을 요구하는 使節의 數는 增加했다. 同盟國의 要請에 응하는 여부는 執政官의 功을 세울 수 있는가 여부에 달려있었다. 로마 정치인의 機會主義적 사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로마와 국제관계

 국가의 주권존중과 국제관계가 전개 된 것은 30년 전쟁이 끝난 뒤, 베스트 팔렌 條約을 맺은 이후(1648년)다. 그 이전에는 威嚴있는 자가 그자에게 갖추어진 權威로 命令하는 것은 상대가 누구이건 問題있는 行爲로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權威가 없는데 쓸데 없이 參見을 하는 것은 越權으로 생각 戰爭을 不辭했다. 一 例로 제 3차 마케도냐 전쟁 때 로도스가 仲裁하려하자 로마는 발끈해 전쟁을 하려했다.


로마의 尨大한 軍事力

거대한 軍事力 : 기원 전 3세기  전반 이탈리아 전 국토를 산하에 둔 단계에서 로마의 세력아래 놓인 영역은 13만 3,120㎢에 가까웠고 기원전 264년 성인 남자 시민 수가 29만 2,000명, 기원전 225년 동맹군의 동원수가 37만 5,000명이었다. 同盟國의 動員은 가능 동원의 반 이므로 동맹국이 총 동원하면 75만이 되어 로마 시민군과 합쳐 100만의 군대를 전개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추정 : 로마인구 100만

 비교 : 아테네 전성기 시민 수가 5만명 달한적 없음

          알렉 산드로 대왕 東征軍勢 5萬


로마인의 등장

대 帝國의 建設 :  북(브리튼/영국) → 남(사하라 사막) → 서(대서양) → 동(유프라 테스강)

 로마는 衰亡하는 순간에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로마 문명이 후세에 남긴 것은 호화로운 건축물이나 미술 작품이 아니라 로마라는 帝國의 特別한 씨스템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건국신화 :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와 암컷 늑대

               군신 마르스와 알바롱가의 왕 누미토르의 딸 레실비아 사이에서 출생, 왕위를 빼앗은 숙부에 의해 두 쌍둥이는 테베레 강에 버려지고 만다. 무화가 나무 가지에 걸려 암 늑대 한마리가 젖을 빨려 살렸다. 성장한 두 형제는 세력을 확대하고 다툼으로 동생 레무스가 형에게 죽은 후 753년 로마가 건설 되었다.

☞ 늑대의 의미 : 당시 이탈리아 半島에는 크게 勢力을 확대하던 에투루리아인이 있었는데 늑대를 崇拜하는 風習이 있었다. 神話에서 늑대가 등장하는 것은 로마 초기 에투루리아에 크게 影響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투루리아인은 建設 技術이 뛰어났다. 紀元前 509년경에 에투루리아인계 마지막 왕이 追放되면서 王政에서 共和政으로 넘어갔다.


初期의 共和政

 공화정(로마 도시국가)             →            帝政(帝國으로 成長)

 SPQR(Senatus Populus Que Romanus)         창시자 <카이사르, 아우구스 투스>


과두정(寡頭政) : 시민 + 원로원(기원전 300년전 소수 재력가, 후에 유복한 시민 포함)

사회기반 : 정복 후 시민권 부여(로마 시민 수 증가), 로마 농업국가 疏忽 한 이유는 제국시대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이다.


 市民階級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에 로마 영토가 확장되자 소규모 농업으로 생활하던 평민의 몰락, 귀족의 대규모 농장화, 정복도시(동맹시)의 시민권 부여, 시민 수 증가하는데 계급적으로 힘은 약해지는 엉뚱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평민

農莊의 出現

市民權의 擴大 適用 → 民會(시민집회)씨스템의 기능이 잘 되지 않음

平民의 意思權 反映 약화 : BC 367년[리키니우스 법 + 공직에 평민이 가능]

                                    BC 287년[호르덴 시우스 법/ 평민회의에서 결의만으로 법률 제정]

포에니 전쟁{ 포에니는 라틴어로 페니키아인이란 뜻이다}

로마와 카르타고 전쟁 : 2세기에 걸친 장기간 전쟁.

 제 1차 포에니 전쟁 : BC 264 ~ BC 241 시칠리아 섬 패권을 두고 싸움

 제 2차 포에니 전쟁 : BC 218 ~ BC 201 한니발의 등장. 에스파냐에서 발발 →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침입. (전쟁 후 로마의 제국화 진행 시발점)

 제 3차 포에니 전쟁 : BC 149 ~ BC 146 카르타고 멸망


 트라시 메누스 湖畔 싸움 : 기원전 217년 로마군 패배

 칸나이 전투 : 기원전 216년 로마군 병력 2배에도 불과하고 패배

 한니발의 약점 : 알프스를 넘으면서 5만 병력이 1/3 감소, 補給 遮斷으로 物資 不足

 로마의 전략 : 1) 空白 常態의 에스파냐의 카르타고 領土 攻擊

                    2) 로마 배반한 카프아 파괴

                    3) 카르타고 本土 攻略(아프리카 누스) ☜ 한니발의 이탈리아 半島에서 撤收.

 제 2차 포에니 전쟁 : 西 地中海 運命을 決定짓는 대 事件, 기원전 2세기 초 로마는 北部 포강 유역을 征服 마침내 이탈리아 반도 全體를 지배하에 둔다. 戰後에도 한니발을 계속 추적 소아시아의 북서부 바티니아로 도피했다 自殺.


東方政策

 로마가 헬레니즘 世界 全體를 支配할 것이라 豫想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칠리아, 사르데냐, 에스파냐 등 戰爭을 통해 領土를 獲得하는 사이 새로운 存在를 確認했다. 그것은 奴隸와 黃金이었다. 로마에 富를 안겨준 戰爭은 로마인의 野心을 일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