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르네 그루쎄 지음)

해암 송구호 2016. 1. 12. 07:03

문명국가와 야만족의 구분은 어떻게 지어진 것일까? 과거 로마는 켈트족을 야만족이라 불렀다. 갈리아는 게르만족을 야만족이라 했고 게르만족은 슬라브족을 야만족이라 했다. 중국인은 남중국인을 미개한  야만족으로 불렀다. 문명의 격차를 두고 인접국가를 멸시한 것이다.

 ☞ 유라시아 - 지구상의 대륙은 크기 순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남 아메리카, 남극대륙, 유럽, 오세아니아 등 7개국이다. 이중에 유럽과 아시아는 하나의 대륙으로 보아 유라시아라고 한다.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는 높은 산맥이나 해양에 의한 뚜렷한 경계가 없기 때문에 역사적, 문화적인 개념만 존재한다.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선은 북극해로부터 우랄산맥 동쪽 경사면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서 엠바강을 따라 남쪽으로 이어지다가 카스피해 북부 연안에 이른 후 카스피해 서쪽에서 쿠바 - 마니츠 저지대를 지나 아조프해와 케르치 해협에 까지 이르는 선이다.

☞ 초원 - 겨울이되면 시베리아 타이가[아한대 기후에 냉대림이 펼쳐진 생물군계 /북방수림(케나다)]의 영향을 받아 극지방의 날씨가 엄습하였고, 여름이 되면 고비사막의 기후에 영향을 받아 땅이 타들어 가는 더위가 지배했기 때문에 가축이 먹을 풀을 찾아 흥안령, 알타이, 타르바가타이와 같은 산지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 유목민 - 정주민을 마치 자신이 부리는 농사꾼처럼 여겼고 도시와 경작지는 그들의 농장이었으며 한낱, 착취(搾取)의 대상에 불과했다. 정주민 중에 순순히 응하는 자는 정기적인 공납(貢納)을 했고 반항하는 자들에게는 약탈(掠奪)을 했다. 이러한 현상은 기원전 2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투르크 - 몽골인 관계에서 볼 수 있다. 중국의 경우 천자가 주는 것이기 때문에 하사품이라 했다.

 

스키타이

스키타이인 : 그리스인 - 스키트(Scyth), 페르시아인, 인도인 - 사카(Saka)

                  북방의 이란인

 기원전 7세기부터 3세기에 걸쳐 러시아 초원의 지배자로 군림, 스키타인을 인구어족의 인도 - 이란 또는 아리안 계통에 속하는 이란계로 분류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방식은 같은 시기에 중국 변방에 투르크 - 몽골 계통의 흉노와 흡사하다.

☞ 헤로도투스(BC 720 ~ 700)기록

 남러시아에서 스키타이인이 키메르인을 쫓아냈다. 스키타이인이 유럽으로 이주한 것은 Issedo-n인에 의해서 밀려났고 Issadon인은 다시 Arimaspi인에 의해 밀려났기 때문이다. Issedon인은 Pin -우르계였다.

스키타이(남 러시아/ 현크림지역)는 기원전4세기 ~ 2세기경 샤르마티아인에 흡수되었다. 이란인에 속하고 용맹하며 특히 전투 중 뛰어난 말타기 실력이 유명하다. 그들이 건설한 문명도 탁월했다. 30년간 전쟁을 통해 카프카스와 흑해 북부평원을 점령하고 있던 킴메리족을 정복하고, 페르시아 서부에서 시리아와 유대 땅을 지나 이집트까지 영토를 넓혔다. 스키타이는 페르시아를 지배하던 메디아인이 아나톨리아 지방까지 몰아내 페르시아 경계지역과 쿠반을 거쳐 러시아 남부로 축소 되었다. 스키타이는 2세기에 멸망했다. 남자가 사망하면 그의 아내와 종, 많은 말을 함께 매장하는 장례 풍속이 있다.

 

스키타이 예술 : 주거(고정된 건물이 없어) 없는 자는 사실주의적 표현 요구하는 조각, 부조, 그림과 같은 것과 거리가 멀다.옷치장 장비와 마구 장식에 일부 나타나고 있다.

코카서스, 소아시아, 아르메니아, 메디아, 앗시리아 침공

☞ 코카서스 : 유럽을 중심으로 북아메리카 서아시아에 사는 인류집단 파부색은 백색내지 담갈색, 머리는 중두형이며 키는 크고 눈빛은 청색내지 담갈색이다. 일반적으로 피부색소가 적고 밝은 빛이며 회색, 청색, 녹색 등의 홍채를 갖는 점인데 집단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고위도(일조량이 적은 지방) - 알프스 이북의 유럽, 특히 스칸디나 지방은 흰 피부에 금발이다.

☞ 메디아 : 헤로도토스는 프라오르테스(기원전715경 추정)의 아들 데이오세스가 메디아 왕국을 세웠다. 엑바타(지금의 하마단)에 수도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33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메디나를 점령 자신의 제국을 분할해 메디아 남부를 마케도니아의 페이톤에게 주어 결국 셀레우코스 왕조에 넘겨주었으며 메디아 북부는 이전에 다리우스 3세의 장군이었던 아트로 파테네에게 주었다. 기원전 152년 메디아는 파르티아의 왕 미트라 다테스 1세에 점령 당했으며 이무렵 아트로파테네와 함께 사산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 사르마트인 : 이란계 북방 유목민, 기원전 3세기 후반경 볼가강을 건너 러시아 초원에 침입 스키타이를 크리미아 쪽으로 몰아냈다. 창을 사용하는 기마민, 원뿔형 모자, 쇠비늘로 된 갑옷.

 예술 : 동물양식, 스키타이인보다 양식화나 기하학적 장식화에 강한 취향, 그리고 도료를 입히는 것을 좋아했다.

 

흉노(匈奴) : 기원전 4세기 ~1세기 몽고 지방에서 세를 떨침

 흉노의 기원 : 스키타이, 사르마트(이란계) - 초원의 서부인 러시아 남부, 투루가이 서부 시베리아 지배. 중국사료에는 험윤(玁狁)으로 알려져 있고 그 이전에는 胡다. 현재 북경의 서부와 서북부에 성립되었던 북수(北戍)가 胡의 하나 였다고 추정했다. 기원전 4세기경 중국 왕조인 조에 항복했다. 조의 무령왕은(기원전325~298) 산서의 최북단(대동지역)과 현재 오르도스의 북방(기원전300)을 그들로부터 빼앗았다.

흉노의 영향

1) 무기 : 전차(무거운 전차) → 기병(기동력)

2) 의복 : 고풍스런 걷옷 → 바지

3) 방어 : 만리장성(진시황)

흉노가 국가적인 체계를 갖춘 시기 : 3세기 후반

유목민의 고정 거주지 : 오르콘강 상류 산지(카라코롬) / 훗날 징기스칸이 수도로 정한 곳

중국인이 묘사한 흉노의 모습

신체는 작으나 땅땅한 편, 머리는 둥글고 크며 안면은 넓고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콧구멍이 넓으며, 콧수염이 덥수룩하고 귀에 구멍을 뚫어 둥근 모양의 귀걸이를 달았다. 머리카락은 자르고 정수리 머리털만 남긴다. 눈빛이 강렬하고 눈섭은 짙고, 눈은 찢어진 모양이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겉옷은 양쪽이 터져 있으며 그것을 묶은 허리띠의 끝을 앞으로 늘어 트린다. 추위 때문에 소매는 단단히 묶는다. 짧은 털로 된 망토를 어깨에 덮고 털모자로 머리를 가린다.신은 가죽으로 만들었고 넓은 바지를 허리띠로 단단하게 묶는다. 허리띠에는 활집을 왼쪽 넓적다리 앞으로 기울여 매단다. 화살통 역시 허리띠에 매되 등뒤에 걸치고 활 시위는 오른쪽을 향하도록 한다.

순장(殉葬) : 흉노, 스키타이는 수령의 처첩이나 하인들을 그의 무덤에서 목을 베었는데 그 숫자가 흉노의 경우 수백, 수천을 넘었다.

헤로도투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스키타이는 적의 두개골을 눈섭 부위에서 잘라서 가죽으로 밖을싸고 안쪽에는 금박을 입혀서 컵으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흉노, 스키타이의 전쟁 노획물

 수급 : 머리가죽을 말 안장에 전리품으로 매달고 다녔다.

6세기 돌궐(흉노후예)은 전사자의 무덤에 일생동안 죽인 수 만큼의 석인을 세웠다.

스키타이인은 성스러운 땅에 칼을 꽂고  거기에 적의 피를 뿌렸으며 처음 죽인 적의 피를 한잔 가득 마셨다.

 약탈 : 중국의 농경지 약탈 후 중국의 기병이 추격하면 고비초원으로 유도, 배고품, 갈증으로 기가 꺽일 때까지 공격을 하지 않다가 약해지면 활로 공격.

 

 흉노의 예술

허리띠(청동제 양식 동물문양)

금, 은, 동 장식 / 고리, 마구, 장비

 

흉노의 1차 공격과 월지의 이주

3세기 말 - 큰세력으로 등장 

진(기원전 221 ~206)이 중국을 통일한 무렵, 진시황제는 장군 몽염을 보내 만리장성을 완성하게 했다. 진의 붕괴와 한(기원전202)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내전, 흉노가 산서지역 중심지 태원을 공격(기원전201), 유방이 흉노를 물리치기 위해 달려왔으나 당시 평성근처 백등산에서 포위되는 신세가 된다. 그는 흉노의 선우와 공주를 결혼시키는 협상을 통해 포위에서 살아났다.

 

흉노를 치기위해 월지와 동맹 제의 

무제는 흉노를 칠 계획으로 월지와 동맹을 맺으려 기원전138년 장건을 사절로 보냈는데 중도에 흉노에 잡혀 10년을 억류됨. 소그디아나의 월지는 새로운 영역에 만족, 고비문제 관심을 두지 않음. 무제는 단독으로 공격에 나섬. 이릉이란 젊은 장수는 오천 명의 보병을 거느리고 중국을 출발 거연을 거쳐 북쪽의 에친골에 도착한 뒤 다시 북쪽 옹긴 강 방향으로 삼십 일 동안 행군했다. 준계산(현재 투프쉬 인근)에 도착할 무렵 흉노의 팔만 기마병사에 포로가 되어 유린 되었고 이중 삼천은 중국과 흉노의 국경 50Km 지점에서 선우가 매복하고 있다 막아서 겨우 사백 명만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무제는 격노했고 이릉의 명예를 지켜주려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였다.

기원전 36년 장군 진탕은 추강까지 습격 손쓸 틈도 주지않고 질지를 잡아 목을 베었다.(기원전 36~35년) 이후 질지를 따라 아랄지역까지 들어온 흉노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이 문명세계와 접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세기말(370 ~375) 그 후예들이 볼가강과 돈강을 건너가 유럽을 공격할 때서야 비로서 서 흉노가 (발라미르와 앗틸라 ) 고전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유럽의 훈(Hun) : 앗틸라 ( ~ 453년 사망)

 기원전 35년부터 서 흉노의 자취는 보이지 않는다. 선우와 갈등을 보인 질지가 북부 몽골리아의 휘하 흉노부족을 이끌고 아랄해와 발하쉬 북부의 초원으로 이주했다가 중국 원정대에게 쫒겨 피해서 죽은 것이 바로 그 때였다. 4세기가 되어서야 그들이 유럽에 들어와 로마세계와 접촉하게 되면서 비로서 그들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되었다.

 발라미르 수령의 지휘아래 볼가 강 하류를 지나 돈 강을 건너 테릭과 쿠반의 알란인들을 격파하여 복속시키고 드네프르강 서쪽에 있는 오스트라 고트를 공격하여 늙은 왕 에르마나릭을 패배시켜 절망속에서 자살하게 만들었다. 오스트라 고트는 대부분 훈족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비시고트는 침입을 피해 다뉴브를 건너 로마제국으로 들어갔다.(376년)

 훈족(흉노)이 아랄해를 떠나 유럽으로 들어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로마와 게르만 세계에 훈의 침입

훈의 난폭함에 대한 기록(암미아 누스, 마르켈리누스, 요르다네스)

수염이 자라지 않게 하기위해 아이의 빰에 깊은 상처를 낸다. 그들은 음식을 요리하거나 양념을 치지 않고 말안장 밑에 놓아두어 부드러워 진 들풀의 뿌리와 고기를 먹고 산다. 그들은 정주를 모르고 추위, 배고품, 갈증으로부터 단련되어 있다. 

앗틸라의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 선포(441년)

다뉴브강에서 세르비아 모라바 강으로 이동하여 나잇수스를 점령하고 필립포 폴리스를 약탈하고 트라키아를 파괴한 뒤 아르카디 오폴리스까지 약탈했다. 448년 화의를 통해서 황제는 다뉴브 강 남쪽 횡으로 현재 벨그라드에서 스비쉬토프에 이르고 종으로 니스에 까지 이르는 지역을 그에게 할양해 주어야 했다.

전쟁과 정치적 전술을 병용

 공식적인 관행에 따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외교적 구실을 얻어 냄으로써 어떤 경우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하려 했다. 고의적으로 강조하거나 모호하게 협박하는 투의 말씨, 조직적인 파괴와 대규모 학살은 적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이다. 반면 백성에게는 공평하게 깨끗한 판결을 내리고 그의 하인들에게 부드러우며 여타의 식구들이 황금접시로 식사할 때 나무로 된 접시를 이용하는 등 검소하게 생활 하였다. 무당 주술에 지나치게 의존했고 주벽이 심했다. 그의 주변에는 그리스, 로마, 게르만 출신의 책사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