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사라센인 입장에서 본 십자군 전쟁
메뚜기떼가 공포스러운 것은 메뚜기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먹고간 자리가 황무지로 변해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유럽사회에서 십자군 원정에 대한 여론이 들끓을 무렵 도시 빈민층에 은자(隱者) 피에르라는 인물이 나타났다. 그들에게 이상향으로 여겨진 중근동의 예루살렘은 성지로서 뿐 아니라 새로운 보금자리로 되찾아야할 약속의 땅이다. 그가 유세를 하는 곳마다 많은 군중들이 몰렸고 그를 따르는 무리가 생겼다. 난민행렬이란 표현이 적합하리만큼 남루(襤褸)한 옷을 입은 한 무리의 남녀노소가 마르마라해를 건너 소아시아로 갔다.
대략 사, 오만명의 인원이 몰려 갔으니 그들이 지나는 곳은 초토화(焦土化)되었다. 그들 입으로는 성지탈환이라고 했지만 힘없는 그리스 정교회의 재산을 약탈해서 큰 피해를 입혔다. 이들은 민중 십자군이라 칭했고 자신들에게 저항하면 살인과 방화도 서슴치 않았다. 1096년 23세" 이븐 알 칼라니시( 1096년 23세)"의 기록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들여다 볼수 있다.
시리아의 마라는 올리브, 무화가, 포도를 재배하는 농촌마을이다. 이마을에 십자군이 약탈을 했다. 마을주민을 죽이고 방화도 서슴치 않았다. 항전을 포기하면 살려주겠다며 건물 곳곳에 피신하라고 해놓고 가둔 후 불태워 죽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솥에 넣고 삶거나 꼬챙이에 꿰어 불에 구어서 사람을 먹었다. 십자군 연대기 저자"라울드 카엥"의 고백에도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십자군 지휘관이 보낸 서한에서 마라에 주둔한 군인들이 무시무시한 기근이 엄습해와 사라센의 시신으로 연명할 수 밖에 없었다는 글이다. 이런 내용이 아랍의 서사문학속에서 "프랑크인<십자군>을 식인종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라전투에 참가했던 십자군중 "알베르 덱스(프랑크인)"의 상황증언에 따르면 "우리들은 투루크인들과 사라센인들의 인육을 먹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개조차 먹는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랍인들은 공포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인간으로 느끼는 공포가 아니라 포식자로부터 언제 잡혀먹을지 모르는 두려움이다. 먹이 사슬에서 상위 포식자 앞에서 오금이 저리는 공포감을 동물세계서 종종 보아 알고 있다. 마라의 전투 이후 사라센 사람들은 먹을 것을 알아서 들고 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성문을 활짝 열어 십자군을 맞이했고 그들이 좋아하는 귀금속을 알아서 바쳤다고 하니 식인종에 대한 공포감은 아마도 끔찍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사라센들의 시각에서 십자군은 야만인, 야수와 같은 존재다. 십자군을 통칭해서 프랑크인이라 불렀는데 '프랑크인은 아량이 없었다. 형언키 어려운 살육으로 얻어진 승리를 요란스럽게 자랑하면서 자신들이 숭배하던 그 도시를 야만스럽게 파괴했다.'고 씌어있다.
십자군의 "예루살렘 성전 해방은 유럽인들의 시각이고 사라센인들은 침략으로 여겼다. 물론 이 땅은 로마시대는 로마의 속주로 범유럽권의 지배하에 있었다. 오스만제국이 시리아 땅을 차지하면서 예루살렘은 사라센인들의 땅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종교는 이슬람이다. 로마 속주로 있을 때 유대인의 부세 저항은 거세고 끈질겼었다. 예루살렘은 종교의 성지로서 유명함보다 성지를 두고 벌어진 로마에 저항했던 곳으로 더 유명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메시아를 절박하게 부르짖은 것도 로마의 속주로부터 자유를 얻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예루살렘의 주인이 사라센인으로 바뀌면서 성지 순례자에게 입장료를 받았다. 성지로부터 쫓겨난 유대인이나 유럽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교인은 그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성지순례에 입장료를 내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