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역사연구1(토인비)

해암 송구호 2015. 11. 5. 04:06

 

바빌로니아 및 시리아 사회의 내적 프롤레타리아

♧ 성서에 기록된 아브라함과 모세 인물 : 성서의 전승자 아브라함과 모세를 예언자 및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역사적 배경에 놓고 있었다는 것에 주목 즉 모세의 출생은 이집트의 신제국 쇠퇴기와 동일한 시대로 되어있고, 아브라함의 출현은 수메르 사회의 세계국가 함무라비에 의하여 잠시 재흥된 후 이제 멸망하려는 그 최후의 시대와 동 시대로 되어 있는 것이다.

◈ 조로아스터교 : 고대 이란의 종교로 조로아스터(Zoroaster, 기원전 660~기원전 583)를 시조로 삼는 고대 종교이다. 아후라 마즈다(Ahura-Magda)를 최고신으로 숭배하기 때문에 마즈다교라고도 하고, 배화(拜火) 의례가 있기 때문에 배화교라고도 한다. 5세기경 중국에 전해져 요교로 불리었다. 시조인 조로아스터는 서부 이란, 지금의 아제르바이잔에서 출생하여, 30세 때 하늘의 계시를 받은 예언자로서 원시 이란 종교의 신 관념을 토대로 유목 민족에 대한 농목 민족의 투쟁을 반영한 인물이었다.
광명과 선의 신, 아후라 마즈다와 암흑과 악의 신, 앙그로마이뉴(Angro Mainyu)의 끊임없는 투쟁의 장이 이 세계라고 하는 이원론적인 우주관에 입각한 교의를 설파하였다. 동부 이란의 박트리아 왕의 보호하에 이란에서 서아시아 각지까지 교세가 확장되어 고대 이란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기원전 5세기). 특히 사산 왕조 페르시아 시대(3~7세기)에는 교리도 체계화되어 성전 "아베스타(Avesta)" 가 완성되었다. "아베스타" 에 의하면 선과 악의 두 원리가 대립, 투쟁하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빛과 선의 신이 승리하며, 인간이 선의 신 편에 서서 싸운다면 최후의 심판에 따라 천국에 태어난다고 한다.
천국에는 아후라 마즈다 아래 6개의 선령이 있고, 그 아래에 태양 · 달 · 별 등 다수의 선령이 있어, 이원론적이면서 아후라 마즈다를 최고신으로 하는 일신교적 성격과 함께 다신교적 성격도 지니고 있다. 특히 불은 아후라 마즈다의 아들로서 신성시되어, 악을 태워 깨끗이 하는 의례가 중시되었다. 인도의 베다교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고, 유대교, 크리스트교와의 유사점도 지적되고 있다. 이 종교를 모태로 미트라교나 마니교가 생겨났는데, 조로아스터교 자체는 이란이 아랍의 무슬림들에 의해 정복됨에 따라 거의 멸망하였다. 지금은 인도에 파르시교도로 불리는 수만 명의 신도가 있을 뿐이다.

 

3. 서구 문명 세계의 내적 프롤레타리아

 Enclosure 운동 : 자유농민을 농촌에서 몰아냄. 농촌의 경제혁명이 농촌인구가 도시로 흘러드는 농민 보유지를 대 사유지제(私有地制)로 대체시킨 농업혁명의 배척력이 아니라 수공업을 증기로 움직이는 기계로 대체시킨 도시산업의 견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排斥力(農) ↔ 牽引力(都)]

영) 프랜드 협회(Society of Friends) : 퀘이커 교도, 不知不識 中 물질적 繁榮의 신전을 향하여 巡禮(십일조에 양심적 반대), 알코올성 음료 부인 → 코코아 생산 , 소매상의 에누리에 대비 가격을 올려부르는 것 대신 상품 정찰제.

 ☞ 퀘이커 교도 : 일체의 권위를 부정, 무정부 주의(Anarchism)에 가까워 성서의 권위마져 부정" 모든 사람은 신이 심어준 내면의 목소리(inner voice) 즉 양심에 따라 행동할 것을 권함. 성직자와 평신도의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모든 개인이 성직자다. 영국 스튜어트 왕가에서 찰스 2세가 퀘이커 교도의 귀족인 웰리엄 펜(william penn)에게 신 대륙의 땅을 줌. 펜실베니아 식민정부 수립(각국의 이민자 집합, 잉글랜드, 웨일스인, 독일 팔츠인, 아일랜드 살던 스코틀랜드인 등)

웰리엄 팬은 델라웨어강과 슈일킬 강 사이에 "우애의 도시" 필라델피아를 세웠다. 도시 이름은 사도바울 시대 "소아시아의 7대교회 가운데 가장 和睦했던 "필라델피아 교회"에서 딴 것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 폭력을 선택하여 검으로 " 신 예루살렘을 러시아 평원에 건설" 

4. 외적 프롤레타리아

 문명의 빛이 야만사회 내로 조명되면 미개사회 창조적 소수자는 그들의 지도에 따르는 비 창조자의 다수자의 일부로 된다. 거기서 문명과 야만의 경계선(Limes)이 처음에는 야만인쪽으로 밀려가지만 어느선에서 고정되고 그 후부터는 야만쪽이 유리하다.

5. 서구문명세계의 외적 프롤레타리아

서구사회의 물질적 힘이 우수해 야만이 사라졌다. 예외로 아프카니스탄, 사우디아라비아는 야만이 잔존한다.

♧ 십자군 전쟁 : 10세기 세력을 급격히 확대한 이슬람 교도 투르크족이 비잔틴 제국을 압박하고 성지 예루살렘 순례자들을 박해하자, 비잔틴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로마 교황에게 도움요청, 요청을 받은 우르바누스 2세(교황)는 1095년 프랑스의 클레르몽 공의호회에서 유럽군주와 제후들을 향하여 십자군을 창설할 것을 강력히 요청, 1차 십자군을 조직하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사

- 제1차 십자군 전쟁(1096) 플랑드르 백, 툴루즈 백, 1099 예루살렘 입성, 투르크족의 비잔틴 압박에 대한 조치.

- 제2차 십자군 전쟁(1147) : 투르크족의 위협에 조직

- 제3차 십자군(1187) : 예루살렘이 투르크족에 넘어가자 예루살렘 회복 목적. 프랑스 필립 오귀스트, 영국, 독일의 황제가 참석했으나 내분으로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 독일황제는 강에서 溺死했다. 프랑스  필립오귀스트는 귀국했고 영국의 리처드 1세는 이슬람 순례자들의 예루살렘 입성을 허가하는 협상을 맺었다.

- 제4차 십자군 전쟁(1202년)

- 플랑드르 백작을 위시한 북 프랑스 기사들 주로 참여, 이들은 도덕적 비난을 받음. 이슬람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로 얽힌 베네치아 상인들과 협력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하고 그곳에 "라틴제국"을 건설(1261년 라틴제국 멸망)했다. 결국 십자군 전쟁은 동방무역의 패권을 다투는 장으로 변했다. 이결과로 베네치아 상인이 비잔틴 상인을 누르고 동방무역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다.프랑스 독일의 소년 십자군(1212)이 마르세유에서 상인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간 사건은 십자군의 커다란 비극이다.

- 제5차 십자군(1217) : 이집트 다이엣타 공격, 프랑스 루이왕.

- 제7차(1248), 제8차(1270) 탈환했던 다이엣타 재점령, 루이왕 자신이 포로가 되어 엄청난 몸값을 치뤘다.(1270년 튀니지에서 병사)

십자군 전쟁은 서방의 그리스도교 세력과 동방의 이슬람교 세력간 충돌로 기원전 4세기에는 서방의 승리로 끝났으나 기원 후 13세기의 충돌은 동방의 승리로 끝났다.

십자군 전쟁의 영향

- 8회에 걸친 200년 전쟁

- 프랑스에 큰 영향 : 종교) 전쟁 실패로 교황권이 크게 약화됐다. 반면 왕권은 크게 강화됐다. 또한 지중해 지역의 무역 재계로 상업이 발전하면서 기사계급도 점차 몰락하게 되었다.

☞ 페르시아 전쟁 : BC490년경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페르시아 왕국은 이오니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에게 해 동부에서 북부에 이르는 각 도시를 공략했다. 이들 도시국가들이 정복당한 후 페르시아의 군대는 바로 그리스로 향할 것임은 누가 보아도 자명했다. 하지만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에 대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육군강국이던 스파르타는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내분 중이었고 같은 해양국가인 아테네와 아이기나는 페르시아군과 대처하는 강, 온건노선의 차이 및 잇권다툼으로 서로 반목을 거듭하던 상황이었다. 이를 기회로 여긴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는 다티스를 육군사령관으로 삼고 알타프레네스를 해군사령관으로 임명해 출격을 명령했다.

 두 장군은 600척의 함대에 약 20,000명(역사가 헤르도토스에 의하면 26,000명이라고 함)의 병력을 싣고 키르키아를 출발해 그리스로 향하면서 키크라데스 제도의 각 도시국가인 낫소스, 델로스, 에레트리아를 차례로 함락시키고 아테네로 향했다.

  페르시아의 두 장군은 기마부대를 전개하기 좋은 장소에 상륙해야 한다는 히피아스의 조언에 따라 마라톤에 상륙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기마부대가 전투에서 전혀 활약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히피아스는 아버지인 페이시스트라토스와 함께 아테네로 귀국해 성공시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는 설도 있다.

  또 당시 아이기나의 약탈행위에 의해 팔레론 만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아테네가 마라톤을 흑해 연안부의 수출기지로 삼았다는 점에서 페르시아군이 상륙지점으로 선택했다는 말도 있다. 아무튼 페르시아군의 동향을 탐지한 아테네에선 밀테아데스를 비롯한 10명의 장군을 선출해 플라타이어의 원군과 합류한 중무장 보병부대를 마라톤으로 급파하고 스파르타에도

원군의 사자를 보냈다.

 다리우스 1세의 명령을 받은 페르시아 원정군은 군선 600척을 스코이니아 만에 정박시킨 후 상륙해 경, 중무장 보병 및 기병을 포진시키고 중앙에 주력을 집결하는 진을 쳤다. 이에 반해 약 9,000명의 아테네 군대와 플라타이어 군대 약 600명의 연합군은 마라톤 남부의 가도로부터 진입해 스코이니아 만의 헤라클레스 신전 앞에서 진을 치고 페르시아군과 대치했다.

 아테네와 플라타리아 군(그리스 연합군)을 지휘하던 장군들은 앞으로의 전개에 대해 회의를 열었다. 이에 스파르타에서 원군이 오기를 기다릴 것인가, 바로 전투에 들어갈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그러나 밀테아데스는 지구전을 주장한 칼리마코스를 뛰어난 언변으로 누르고 즉각 주전론을 결정했다.

 당시 그리스 연합군의 총지휘관 자리는 10명의 장군들이 하루씩 교대로 돌아가며 취임하였는데 밀테아데스는 자신의 차례가 되자 바로 페르시아군과 전투에 나섰다. 그는 9월 12일 이른 아침에 전군(거의 모든 병력이 중무장 보병이었다)을 집결해 오른쪽의 우익에 칼리마코스의 군대, 왼쪽 좌익에 플라타이어의 주력부대, 그리고 밀테아데스 자신이 중군을 맡아 총공격을 걸었다.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군과 같은 긴 전선을 유지했기 때문에 중앙부가 방어가 제일 약해 최대의 약점이었다. 하지만 페르시아군의 전법을 알고 있던 밀테아데스는 이를 역이용해 기습하는 전법을 세웠다. 그가 세운 전법은 적진까지 8스타디온(약 1,480m)를 단숨에 돌격해 들어가는 것인데, 활의 사정거리 바깥까지 도보로 접근해 기다리다가

페르시아군이 행군하기 시작하면 갑자기 뛰어들어 같은 진을 세운 페르시아군 중앙을 공략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전법은 숫자가 적은 그리스 연합군에겐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지만 백병전에 익숙한 그리스군은 중무장 보병의 밀집대형을 유지한 채 오랜 시간에 걸쳐 페르시아군을 물고 늘어졌다. 전선이 늘어나자 몇 열밖에 포진하지 않았던 아리스테이데스의 그리스 중앙군은 페르시아 보병의 압박을 받았지만 좌, 우익이 두터웠기에 역으로 페르시아군을 포위해 패주시켰다.

 그리스군은 패주하는 페르시아군을 추격하지 않고 그대로 페르시아 중앙군을 포위하여 섬멸시켰다. 그리고 나서야 후퇴하는 적군을 추격했다. 이 때 칼리마코스를 포함한 그리스군의 사망자는 192명인 것에 비해 페르시아군의 사망자는 6,400명을 넘었다. 또 페르시아 군선 7척이 그리스군에게 나포되고 말았다.

 마라톤의 승리는 아테네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마라톤 전투에서 싸운 시민군은 마라토노마카이라 불리며 아테네 전사들의 우상이 되어 각종 도자기 및 미술품에 그 모습이 새겨졌다. 또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에우클레스라는 병사가 완전무장인 채 마라톤 전장에서 아테네까지 달려 승전소식을 전한 뒤 숨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그 병사는 페이피피데스라고도 한다. 이 일화는 지어낸 가능성이 높지만 이에 의해 제 1회 올림픽에서는 아테네와 마라톤 간의 달리기 경기가 개최되어 오늘날의마라톤 경기의 시초가 되었다.

 한편 아테네는 페르시아 원정군을 물리침으로 그때까지의 유화정책을 버리고 기원전 488년 경에 우민주의자인 히파르코스를 도편추방하고 다음해엔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과 내통하여 방패에 포진도를 그려 넘겼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아르크메온 일가(페르시아 유화정책파)및 중심인물인 메가클레스를 역시 도편추방했다.

 기습전법으로 승리한 밀테아데스는 이 승리로 자신감을 얻었지만 파로스 섬 원정에 올랐다가 실패해 많은 병력을 잃고 패해 돌아왔다. 그는 추방되지는 않았지만 시민들을 사기친 죄목으로 고액의 벌금을 지불해야 했기에 울화병으로 인해 전쟁의 상처가 도지는 바람에 사망하고 말았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아테네인은 마라톤의 승리를 페르시아 전쟁의 종결로 착각했는데 오직 테미스토클레스 한 명만이 이것을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라고 간파했다.(BC 480년 페르시아군의 재 침입) 스파르타의 구원군 약 2,000명은 이틀만에 아테네에 도착했지만 전쟁이 끝난 뒤라 헛걸음을 해야만 했다.

 출처 : 플루타르코스<영웅전>. 헤르도토스<일리아드>. 

 

6. 외래의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과 고유의 인스피레이션(靈感, 刺戟)

- 문명의 쇠퇴원인은 내부적인 자기 결정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외래적 자극은 불화와 파괴의 결과를 가져온다. 반면 내적 자극은 조화와 창조를 가져온다.

고등종교의 탄생 → 외래 인스피레이션에서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