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역사연구1(토인비)

해암 송구호 2015. 10. 31. 09:13

 

제 3편 문명의 성장

 

제 1장 발육 정지 문명

 1. 폴리네시아인과 에스키모 및 유목민

 문명발생 → 성장 ← 발육 정지문명

폴리네시아인(말레시아어 사용) : 태평양 섬 사이 왕래(고립 - 원시 생활로 후퇴)

 ☞ 폴리네시아(Polynesia) : 태평양 중남부에 펼쳐있는 여러섬, 하와이제도, 뉴질랜드, 이스터(Easter)섬을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지대에 있으며 산호초, 화산, 따위로 이루어져 있다. 어업을 주로하며 타로, 감자, 코코야자 따위가 난다.

 대양과 사투

에스키모인

 - 북극연안 : 특수생활 성취

 에스키모인의 열등한 발전 이유 : ① 미개성, ② 자연조건(혹한에 대한 응전)

 얼음과 씨름(사냥) 자연의 폭정.

유목민

 - 반 사막에서 목자(Steppe)년 주기 생활에 성공.

   수렵민 → 농업(카인) / 소산물에 대한 제사 → 목축(아벨) / 인간 기술의 승리

    ☞ 야훼의 선택 : 농산물은 거부하고 목축에서 난 양의 새끼와 기름을 받음

   딩카족 : 수단 남부 나일강 유역의 중앙 습지 주변에 사는 종족, 철 따라 목축 실시

   셀주크족 : 셀주크 튀르크가 세운 나라. 1037년 족장 셀주크의 손자 투그릴 베크가 창건, 중앙아시아, 서남 아시아 대부분을 차지, 터키계 이슬람 교도의 최초 통일국가로  사라센과 미란문화를 섭취하여 문화, 예술, 학술이 발달하였으나 13세기 멸망.

미노스 문명 - 크레타 문명과 동어(지중해의 크레타 섬에서 번영한 고대문명)

 

2. 오스만리

 유목민이 정착민족을 통치해야 하는 환경

 새로운 백성 : 인간 가축으로 생각(취급) 정착민족 통치 즉 유목민의 번견(番犬)에 해당하는 인간을 훈련, 관리와 군인으로된 노예세대였다.

 ☞ 오스만리(OSMANLI) : 오스만 제국을 구성한기간부족 소아시아와 발칸반도 일부에 살며 터키를 구성하는 주요 민족.

 아바르족 : 유목민에서(초원지대에서 쫒겨나) 인간의 목자로 변화

 가축(고기, 젖, 가죽) ↔(교환) 사료

 유목민 정복자 - 일찍쇠망(경제적 불 건전성)

  ♣ 파르티아제국 : 파르니 부족의 족장 아르사케스는 BC 247년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국가를 창설함으로써 파르티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아르사크왕조) 그들은 뛰어난 기마병이었으며 가부장적 부족전통을 계속 지켜나갔다.(기마병 5만중 자유인은 4백명 불과 나머지는 노예)

  ♣ 아바스 왕조 : 아바스 왕조는 750년에 우마이야조의 칼리프를 폐위시키고, 1258년 몽골족의 침략으로 멸망할 때까지 칼리프로서 이슬람 제국을 다스렸다.

아바스라는 이름은 예언자 마호메트의 숙부인 알 아바스(653경 죽음)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알 아바스는 메카의 쿠라이시족 하심 가문 사람이었다. 718년경부터 그의 가문 사람들은 제국의 패권을 얻으려고 애썼으며, 교묘한 선전으로 많은 지지를 얻었다. 특히 시아파 아랍인과 호라산의 페르시아인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747년 하심 가문 사람들은 아부 무슬림의 지도로 반란을 일으켜, 메소포타미아의 자브 강 전투(750)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인 마르완 2세를 무찌르고, "아브 알 아바스 앗 사파흐"를 아바스 왕조의 첫번째 칼리프로 선언했다. 초원지대 노예(군인, 행정관)

  ♣ 우마이야 왕조(코르도바) :  우마이야가는 쿠라이시 부족의 상인가문이었다. 제1차 이슬람교도 내전에서 당시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아부 수피안의 아들 무아위야가 제4대 칼리프인 알리를 누르고 스스로 제1대 우마이야 칼리프가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더 넓은 지역을 장악하고 아랍 부족들을 통치함으로써 통일된 제국을 만들었다. 시리아군이 비잔틴의 이사우리안 레오 3세에게 패배를 당하면서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히샴은 왕조의 몰락을 일시적으로나마 저지했다. 그러나 히샴이 죽고 나자 카이스와 칼브 간의 분쟁이 대규모 반란으로 발전했고, 마왈리는 우마이야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하시미야파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749년 하시미야파는 아부 알 아바스 앗 사파흐를 칼리프로 선포했다. 이로써 그는 아바스 왕조의 제1대 칼리프가 되었다. 인접 프랑크인이 징모해준,  준노예급 근위병 프랑크인들은 그 영토의 동쪽 변경에서 노예를 사냥 "코르도바 노예시장"에 공급해줌. 야만인이 슬라브족이었기 때문에 영어에 Slave(노예)란 뜻이 생겨낳다.

 ☞ 슬라브족 : 유럽의 중동부에 걸쳐살며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아리안계의 여러민족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그리스 정교를 믿는다.

 동 슬라브인 :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서 슬라브인 :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남 슬라브인 :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불가리아

3. 스파르타인

헬라스 사회에 과잉인구 도전에 스파르타의 응전, 오스만리와 흡사, 군인이 귀족계급

플라톤의 "이상국가" 실현

4. 일반적 특성

 에스키모인, 유목민, 스파르타인, 오스만리의 공통점 : 카스트, 전문화(배꾼, 말꾼, 싸움꾼)

 퇴보 " 특수한 환경에 잘 적응한 동물은 진화과정에 장래성이 없다"

자연적 도전에 대응 탄생한 문명

 1) 폴리네시아인 : 대양항해(카누) - 긴장상태 - 해방 - 타락 - 루터스(연명), 되는대로

 2) 에스키모인 : 현) 목숨부지(자연 순응)

 3) 유목민(遊牧民)

 

제2장 문명의 성장의 본질

 1. 잘못된 두 통념

 변화 운동의 반복 : 엘랑비탈(Elan Vital)생명의 비약

신생 헬라스 문명의 최초 도전 : 혼돈 및 고대적 암흑이라는 도전

고도에 유기된 미노스인

 좌초로 오도가도 못하는 아키아인, 도리아인

 ① 미노스 사회의 해체(混沌)

 ② 신생 헬라스의 사회 1) 도시 ← 촌락

                                2) 농촌 ← 목축

                                3) 질서 ← 무정부

 헬라스 사회의 인구 과잉에 대한 도전 : 국내 저지대 주민이 고지대 사는 이웃을 정복하려던 기술과 제도를 해외 영토 정복에 이용. 지리적 확장으로 해결, 기원전 750 ~ 550년경 비 헬라스인의 세력에 정지.

동 - 페르시아(공격) , 서 - 카르타고(공격) / 지리적 팽창 정지.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대왕 : 마케도니아 왕 BC 356 ~ BC323)의 헬레니즘 육상 확장<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의 대제국> 

 

 ☞ 알렉산더 대왕 : 필리포스 2세의 아들로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마케도니아 군사력을 인도까지 진출시켰으며 지역왕국들로 이루어진 헬레니즘 세계의 토대를 쌓았다.
유년기에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20세에 아버지 필리포스 2세를 계승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재위기간 대부분을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정복활동으로 보냈다. 30세가 되었을 무렵에는 그리스를 시작으로 남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인도 북서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살아 있을 때부터 전설적인 이야기의 주제로 다루어졌으며 사후에는 개략적인 윤곽만 역사적인 사실과 일치할 정도로 거대한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헬라스 사회 군사기술 : 스파르타의 창병 방형 밀집부대의 발명 

 제2차 스파르타 메시나(이탈리아 ↔ 시칠리아 사이)

헬라스 사회의 보병 : 마케도니아의 밀집창병, 아테네의 경장병

2. 자기 결정의 방향에로의 진보

 인구어족 : 인도에서 유럽에 걸친 지역에서 쓰는 언어

 성장 : 인간적 환경  정복보다 전진적 변화 → 내면적인 "자기표현" 자기 결정으로 나타난다.

          자연적 환경    (장애극복이나 적의 타도로 나타나지 않음)

 도로(道路) : 에드몽 드몰랭(도로는 어떻게 사회 형태를 만드는가?)

                  지구 표면에는 무한히 다양한 종족이 살고 있다. 이 다양성을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 종족의 다양성의 첫째가는 결정적 원인은 각 민족이 걸어간 도로다. 민족과 사회 형태를 둘다 창조하는 것은 도로다.

 웰스 : 태고 지질년대 일어난 극적 사건을 재 구성하기 위하여 상상력을 활동시키는 것은 그의 가장큰 특기다. 이 작은 짐승모양의 물건들 哺乳動物 先祖 생존, 爬蟲類(거대)는 멸망.

 서구사회 : 스칸디나비아의 습격(襲擊), 격퇴(擊退) 성공.

                (군사적, 사회적 기구를 만듬)

 봉건국가 : 계급간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분화가 긴박과 긴장을 일으켰고 이 압박과 긴장은 성장기의 서구사회가 직면하게 된 다음 도전을 낳았던 것이다.

 페르시아, 카르타고의 군사적 압력은 헬라스 사회에 자극을 주어 아테네 해군, 시라쿠사의 참주정치(僭住政治)가 발전했고 긴장과 緊迫은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기원전 431 ~404),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기원전500 ~ 365)을 낳았다.

 

헬레니즘과 오리엔트

 ☞ 오리엔트 : 일반적으로 이집트·아라비아·아나톨리아·시리아·팔레스타인·이란 등지를 포함하는 지역을 가리킨다. 원래 '해 뜨는 곳', '동방'이라는 방위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동방세계라는 뜻이 부가되어,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세계로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근래 들어 유럽인의 지리적 지식이 점차 확대되면서, 인도와 중국·한국·일본까지를 포함하는 근동·중동·극동의 총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오리엔트는 찬란한 문명이 발생했던 곳으로, 동서양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는데다가 계속적으로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중동지역과 대략적으로 범위가 일치한다. 로마 시대에는 제국 내의 동부지방은 물론 제국 외부, 즉 동쪽에 있는 다른 국가들을 지칭하는 데도 광범위하게 이용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고 서유럽이 그들 나름 대로의 세계를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자신들을 옥시덴트(Occident : 라틴어로 '해 지는 곳', '서방'이라는 뜻의 occidens에서 유래)라 부르게 되면서, 이와 대조되는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동방세계라는 뜻이 부가되어,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세계로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헬레니즘 : 넓은 뜻으로 히브라이즘과 함께 유럽문화의 기반이 된 2대 사상의 하나로 그리스 사상 일반을 말하고, 좁은 의미로는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정복(기원전 323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조(朝)가 멸망하고 이집트가 로마에 귀속될 때까지 약 300년 동안의 오리엔트 세계문화를 지칭한다. 그간 그리스문화는 지중해 동부는 물론 멀리 인도의 동부지방에도 전파되었고, 로마제국에 의한 통일이 이루어진 후에도 로마인에게 계승되어 유럽문화의 전통을 형성하는 원천이 되었다. 특히 알렉산더에 의한 오리엔트 제국의 통일과 그가 죽은 이후 제국의 분열, 항쟁을 반영한 정치적  혼란과 정신적 불안은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모태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러시아 공산주의의 승리(서구사회 기원)

 레닌 - 칼마르크스(서구사회 질서 부정)

 마르크스의 교리가 그리스 정교의 정서적, 지적 대용품화.

 모세 -→ 마르크스

 메시아 -→ 레닌

 경전 -→ 마르크스. 레닌 전집

스탈린의 5개년 계획 : 공업, 운수업, 농업의 기계화(농민의 나라 → 기계공의 나라)

피터대제 → 스탈린(급진적 서구화의 기도)

♣ 간디의 서구화

 인도인의 의복은 인도인의 손으로(외래 방직기계 사용금지)

 

제3장 성장의 분석

1. 사회와 개인(시클로프스적 독립 / 호머)세포

  유기체의 세포 - 산호충, 히드로이드 폴립

  홉스의 저서 리바이어던 표지에 그리스 철학가 아낙사고라스 는 호모이 메리아이(Homoios + meros)로 구성되었다고 하였다. 모든 물체와 사람의 마음의 구성 요인도 그 호모이오스와 메로스를 합하여 붙인 "호모이 오메 리아이(Homoeomeriae)라고 하였다.(질<Homoios>이 같은 부분<meros>)

사회 = 개인들 관계의 체계, 사람과 사람은 상호 관계속에서 일체의 창조, 개인이나 개인들로 구성된 소수파에 의해 시작.

 임무 = 1)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 / 刺戟

           2) 발견(創造, 摸倣<미메시스>)

인간 사회와 개인 사회 관계설명의 올바른 방법?

 종교단체(그리스도교, 이슬람교, 힌두교) / 입술로만 고백(이교정신)

 문명성장 - (창조적 개인, 창조적 소수 세력)성취

 원시사회(발육 정지문명)의 停止文明에 반하여 문명들은 動的인 운동을 하고 있다.

2.후퇴와 복귀(개인)

 창조적 인물 → 신비주의(恍惚) → 더 높은 차원의 행동

 복귀 → 창조자가 사회적 노고와 질곡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능력이 후퇴(隱遁者 anchorite)한 것이다.

 나사로<Lazaros> - 주검에서 4일만에 살아남

바울로가 <고린토인에게 보낸 편지>

첫째 : 곡식에 비유(가을에 후퇴 → 봄에 복귀)

둘째 : 곡식의 부활 → 인간의 부활의 전조(헬라스 사회의 밀교에서 가르친 교의 재 확인)

셋째 : 사망과 생(輪廻)중간 대기기간 중에 신이 하는 일을 통하여 인간이 모종의 변화로 인간부활 가능

 네째 : 새로운 종의 창조 찬미

 싸이클 : 후퇴 → 변모 → 영광 → 복귀

 

♧ 기아(棄兒) / 신화

오이디프스, 페르 세우스 이야기, 모세 기아기(갈대상자), 로물루스와 늑대

☞ 예수의 이야기 : 기아(棄兒)의 일반적 표준을 따름

父(하느님)에게서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성에서 誕生, 다윗의 아들(歡呼)나귀타고 "예루살렘" 입성, 예수의 神性이 명확히 顯現(靈的經驗), 요한에게서 세례 받음 - 자기의 사명 자각, 광야로 後退, 악마의 시험 이기고 성령충만 復歸, 선교 때문에 죽임 당할 것 깨닫고 貌樣의 변화, 한적하고 높은 산으로 들어가 변모 경험, 죽음을 달게 받기 위하여 復歸, 십자가의 못박힘(인간의 고통)감수 → 무덤속에 들어가 復活(不死身) → 昇天

♥ 승천(오시리스) : 무궁한 왕국에서 산몸과 죽은몸을 심판하고 영광으로 다시 오시기 위해(미륵사상과 동일)이 세상에서 하늘로 되돌아 갔다.

♡ 광야의 후퇴 : 모세의 미디안으로의 도망(재현)

    한적한 높은 산에서 변모(變貌) → 모세의 시나이 산에서 변모(재현)

♥ 예수의 신적 존재의 사망과 부활 → 헬라스 사회의 신에 그 선례가 있었다. 그리고 현세의 질서의 종말을 고하는 대 파멸의 때에 나타나서 지배권을 쥘 놀라운 인물은 이미 조로아스터교의 신화에서 구세주의 모양으로 표현되었고, 유대교의 신화에서는 메시아와 인간의 아들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 그리스도교 신화 특징 : 구세주(메시아)의 장래 도래를 이미 인간의 몸으로 이세상에 산일이 있는 역사적 인물이 이세상으로 복귀한다는 점이다.

               後退와 復歸 → "再臨思想"으로 到達

             十字架 死刑 - 예수死亡 - 弟子들에게 希望을 남겨주지 않음

 ☞ 主의 사명을 계승할 용기를 찾으려면 주의 生涯를 과거에서 미래로 投影시킴으로써 그 생애에서 실패의 가시를 빼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 성 바울로 :

파울로스는 소아시아의 키리키아 지방(길리기아, 현재의 터키)의 중심도시 타르소스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출생년대는 신약성서학계에서 기원후 5년 즈음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출생 지역과 년대로 미루어 보아 파울로스는 로마제국의 시민권을 가졌으리라 보고 있으며, 이에 관한 간접적인 기록으로 사도행전 22:25-29에서 파울로스가 선교 활동 중에 유대민족과의 충돌로 로마군에 체포 되었을 때 자신이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라고 말한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파울로스는 사도행전 21:39에서 자신이 타르소스(다소)의 시민권을 갖고 있다는 엇갈린 말을 하고 있으며, 또한 사도행전을 쓴 사람이 바울로 자신이 아니라, 그가 죽은 뒤  사도행전을 쓴 루가이기 때문에 여기에 관한 확실한 단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여하튼 파울로스는 자신의 유대 혈통을 부정한 적이 없으며, 더군다나 그가 이른바 다마스쿠스에서 회심하기까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에 앞장 섰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의 유대인 혈통에 관해서는 더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로마시민권을 나면서부터 갖고 있다는 파울로스의 주장은 그의 집안이 실력있는 가문이었음을 말해주기 때문에 기독교계 일부에서는 기독교인은 파울로스처럼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사회적 성공(成功)에 대한 욕구를 정당화하기도 하는데, 정작 파울로스 자신은 자신의 대단한 출신배경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출신배경을 오물에 빗댄다.

파울로스의 서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석할 때 그는 아마 흠이 없는 교육을 두루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어디서 그리고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의 고향이 고대 그리스 문명의 영향 밑에 있었던 관계로 당시의 일반적인 고전 교육 및 유대교적 율법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는 존경받는 율법학자 가말리엘에게서 율법 공부를 받았는데,유대 전통에 따라 구약성서(율법, 예언서), 율법 해석(미드라시), 수사학을 공부했을 것이다. 이러한 체계적 신학교육은 사도 바울을 유대 전통인 율법을 비판할만큼 뛰어난 신학자로 자라게 해 주었다. 사도 파울로스가 가말리엘의 제자였다는 사도행전의 설명을 바탕으로 회심하기 전까지 그가 바리사이파의 적극 협조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파울로스의 출생과 유대교의 율법을 추종하였던 젊은 시절의 활동은 자신의 사목방향이나 신학적인 견해에 맞지 않을 경우 타협하지 않았던 그의 곧은 성품에서 잘 반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울로의 출생시기에 시리아 사회는 헬레니즘 충격이 제기하는 시대 유대인 사회에서 출생했다.

 

성 베네딕트 : 누르시아의 베네딕토(라틴어: Sanctus Benedictus de Nursia,480년 -543년3월21일)는 ‘좋게 말한’ 또는 ‘축복된’이란 뜻으로 기독교의성인가운데 한 사람이며, 로마카톨릭교회와 성공회에서는 유럽과 학생들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과거 한국에서는 한자로 음차하여 분도(芬道)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베네딕토는 이탈리아 수비아코에 열두 개의 수도 공동체를 세웠으며, 나중에 이탈리아남부에 있는 몬테카시노 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세운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은 서방 수도원의 발생지가 되었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베네딕도회의 총본부가 되고 있다. 베네딕토가 세운 베네딕도회는 마치 하나의 수도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가 세운 수도 회칙을 따르는 개개의 수도원 연합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베네딕토가 수도자들을 위해 쓴 <베네딕도규칙서>(Regula Benedicti)는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규칙서는 요한카시아노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스승의 규칙서>(Regula Magistri)와 거의 내용이 비슷하다. 베네딕도 규칙서에서 나타난 그의 규율은 균형과 중용, 합리성을 두루 갖고 있었으며, 중세에 세워진 대부분의 교회 공동체는 이같은 베네딕토의 정신의 적용을 받아 세워졌다. 그 결과 베네딕도 규칙서는 서방 기독교의 가장 영향력 있는 규율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서방 수도생활의 초석이 되었을 뿐 아니라, 교회 영성과 서유럽 문화 진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연유로 베네딕토는 종종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베네딕토는 오늘날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노르차에 해당하는 누르시아의 한 로마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베다가 전한 전승에 의하면, 베네딕토에게는 쌍둥이 여동생인 스콜라스티카가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가 태어난 해가 480년 즈음이 맞다면, 아마도 그가 학업을 중단하고 집을 떠난 해가 500년이라는 기존의 이야기는 틀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레고리오 1세가 말한 것처럼, 당시 그의 나이가 19세 혹은 20세 미만이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한창 학업에 열중하던 그는 무절제하고 방탕한 삶을 사는 친구들을 보면서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에 대해 고민한 한편,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로마의 귀족으로서 경력을 막 쌓아가려던 시기에 그는 결국 환락과 퇴폐가 만연했던 생활에 염증을 느껴, 퇴학하고 귀족의 신분까지 버린 채 로마를 떠났다.

메스키르히의 마이스터에 은거하며 기도하는 성 베네딕토에게 음식을 내려주는 성 로마노.

그가 로마를 떠난 이유는 은수자가 되려고 했다기보다는 단지 사람들이 많은 도시를 피해 한적한 곳에 살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자신을 아꼈던 나이 많은 유모를 대동하고 로마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엔피데(오늘날의 아펠레)라는 작은 시골 마을로 가서 그곳의 성 베드로 성당 인근에 정착하였다. 이 무렵 베네딕토가 행한 첫 번째 기적이 전해진다. 그 내용은 유모가 빵을 만들기 위해 밀가루를 체질하여 식탁에 올려놓았는데 체가 떨어져서 두 동강이 났다. 절망한 유모가 우는 것을 보고 베네딕토는 조각들을 모아놓고 기도를 올렸고, 기도를 마치고 일어났을 때 체가 완벽하게 수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엔피데로부터 수비아코로 이어지는 거리는 짧지만, 산을 직접 통과해 좁고 어두운 골짜기 어귀를 지나야 한다. 그 길을 계속해서 올라가면 동굴과 그 위에 산 꼭대기가 거의 수직으로 솟은 곳에 당도하는데, 더 앞으로 나아가면 산골짜기로 이어진 더 가파른 길로 이어지며, 오른쪽에는 수심이 150미터 정도 되는 푸른 호수가 있다. 한편 동굴은 삼각형 모양의 커다란 입구가 있으며 약 10피트 정도 되는 깊이이다. 베네딕토는 유모를 떠나 엔피데로 가는 도중 한 수사를 만났는데, 그는 자신의 이름이 수비아코의 로마노이며, 동굴이 딸린 절벽 위에 있는 수도원에 산다고 말했다. 로마노는 베네딕토가 수비아코로 오게 된 연유를 묻고 함께 대화를 나눈 끝에, 그에게 수도복을 주었다. 그리고 베네딕토는 로마노의 권고에 따라 수사가 되었으며, 3년 간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고독한 삶을 위해 호수 위에 있는 천연 동굴 사크로 스페코(Sacro Speco, 거룩한 동굴)에 거처하였다.

 

성 그레고리 대교황 : 교황 그레고리오 1세(라틴어: Gregorius PP. I, 이탈리아어: Papa Gregorio I)는 제64대 교황(재위: 590년9월3일 - 604년3월12일)이다.

기독교 역사상교황레오1세와 더불어 대교황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한 연유로 대교황 그레고리오, 대(大)그레고리오(라틴어: Gregorius Magnus, 이탈리아어: Gregorio Magno) 등으로도 불린다. 그레고리오 1세는 최초로 수도생활을 체험한 교황이자 라틴교부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교회학자의 칭호를 받았으며, 이전의 그 어느 교황보다 가장 많은 저서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례 분야에서는 로마 양식 미사 전례를 개혁하여 미사 전문을 오늘날의 형식으로 만들고, 각 지방에서 제각기 불리던 성가들을 재정리해 전례와 전례력에 알맞게 맞추는 업적을 남겼다. 그리하여 그는 ‘기독교 전례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사후 대중의 강력한 지지로 즉시 성인으로시성되었으며, 로마카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성공회, 루터교 등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상징물은 교황관,비둘기 모습을 한성령, 책 등이며, 음악가와 가수, 교사, 학생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그레고리오가 탄생할 날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540년 즈음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부모는 아들의 이름을 그레고리오라고 지었는데, 이는 그리스어로 ‘파수하다’ 또는 ‘지키다’라는 뜻이다. 이 이름에 대한 어원을 연구했던 중세 작가들은 이름이 내포한 뜻을 교황 본인의 삶에 그대로 투영하였다. 가령 애빙던의 알프랙은“그(그레고리오)는 하느님의 계명 안에서 매우 부지런했다.”라고 논평하였다.

그레고리오는 부유한 로마 귀족 가문 출신으로 부친의 이름은 고르디아누스, 모친의 이름은 실비아이다. 그레고리오의 가문은 교회와 가까운 관계였으며, 그의 고조부는 교황 펠릭스3세이다. 다만 펠릭스 3세는 고트족의 왕 테오도릭의 추대로 교황이 된 것이었던 반면에, 그레고리오는 교황 선거에서 당당히 선출되어 베드로좌를 계승한 것이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레고리오가 교황으로 선출된 덕분에 그의 가문은 당대 가장 막강한 성직 가문으로 부상하였다. 그레고리오의 가문은 대대로 첼리오언덕에 있는 대저택(villa suburbana)에 거주하였다. 반대편에는 팔라티노언덕에는 옛 로마 황제들이 거주하던 궁전들이 있다. 그리고 두 언덕 사이에 거리가 있는데, 오늘날에는 산 그레고리오 거리(Via di San Gregorio)라고 불리고 있다. 그 거리에서 북쪽으로 가면 콜로세움과 맞닿아 있으며, 남쪽으로 가면 원형경기장 키루크스 막시무스와 맞닿아 있다. 그레고리오가 살았던 시절에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이미 황폐화된지 오래되었으며, 개인 소유 건물로 전락하였다. 이 지역에는 수많은 빌라로 뒤덮였으며, 그레고리오의 가문 또한 로마 인근은 물론 시칠리아에도 부동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레고리오는 나중에 챌리오 언덕에 있는 자기 가문의 저택에 프레스코화를 그리도록 했는데, 300년이 지난 후 요한네스히모니데스는 프레스코화를 보고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고르디아누스는 키가 크고 긴 얼굴형에 반짝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실비아 역시 키가 컸으며, 둥근 얼굴형에 눈동자는 파란색이었다. 그녀는 명랑해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레고리오 말고도 아들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의 이름과 생애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마호메트 :    Mahomet, Mohammed(Muhammad)(570?-632). 이슬람교(Islam)의 창시자이며 아랍 제국의 창건자. ‘마호메트’란 ‘찬양받는 자’, ‘뛰어난 자’를 의미하는 말이다. 인류 역사에 있어기념비적인 중요성을 지닌 종교적 · 사회적 · 문화적 발전을 주도한 그의 생애는 대략 3기로 나눌 수 있다. ① 예언자의 소명을 받기까지의 약 40년간에 걸친 초기의 종교적 활동, ② 610년 아라비아의 예언자로서 선언하고 순례자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하여, 622년 7월 15일 메카에서의 박해가 심해져서 메디나로 떠난 ‘히즈라’(hijrah) 즉 ‘이주’ 시대, ③ 622년부터 그가 숨을 거둔 632년 사이에 메디나에서 이슬람교를 통하여 종교와 국가를 창시하는데 성공한 시대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마호메트는 메카에서 가난한 과부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명족 쿠라이시의 출신이며 할아버지는 하심(Hashim)족의 우두머리였으나 메카 정계의 지도적인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마호메트는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할아버지 압드 알 무탈립의 보호 아래 있다가, 여덟 살 때는 할아버지도 여의어서, 삼촌 아부 탈립의 돌봄을 받으며 시리아 등지로 삼촌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대상(隊商)의 심부름꾼이므로 생활정도도 낮았고, 양과 염소를 키우며 그는 스스로 “하느님은 목자 가운데서 예언자를 불렀다. 모세와 다윗을 보라”고 하였다. 595년께 25세인 그는 아사드족의 카디자(Khadijah)라는 약 40세 난 부자 과부의 상업을 책임맡았는데, 이 때 청혼을 받고 결혼하였다. 아들 셋, 딸 넷 모두 7남매를 낳았으나 아들은 어려서 죽었으며, 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이 마호메트의 사촌 알리의 부인인 파티마였다. 마호메트가 알리를 양자로 삼았으므로 알리와 파티마가 낳은 아들들이 마호메트의 후계자가 되었다.
   마호메트는 초년기에 겪은 가난과 고아 신세나 다름없던 불행 탓인지 때때로 메카 근처에 있는 한 언덕의 동굴 안에서 밤을 지새는 습관을 가진 사려 깊고 고결한 사람이었다. 상업중심지 메카의 거상들이 대상에 의한 교역 거래의 독점권을 획득하고 번영하고 있지만, 상인들은 개인적인 이익 추구로 쏠려,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자신들의 전통적인 의무에 대하여는 소홀하였다. 마호메트는 이러한 문제들에 관하여 명상하면서, 610년 그의 나이 40세 때, 히라산 동굴에서 알라(Allah)의 신탁에 접하여, 뒤에 천사 가브리엘과 동일시되는 위엄 있는 존재의 환상을 보았으며, “너는 신의 사자(rasul Allah)이다”라는 음성을 들었다. 이때부터 그는 예언자되기를 결심하여, 알라 중심의 유일신교인 이슬람교를 창립하고, 공공연히 설교를 시작하였으며, 추종자들은 ‘무슬림’(Muslimun) 즉 모슬렘(Moslems)이라고 호칭되었다. 알라는 전능자,창조주, 심판자이며 이슬람이란 신에 대한 ‘복종’의 뜻이다.
   교도가 불어나고 우상숭배를 공격하여 반대파와 토론하며 기적도 행하게 되는 동안에 박해가 심해져서 약 80명이 아비시니아로 피난하였고, 그도 622년 메디나로 이주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히즈라’인데, 이 이주가 일어났던 아랍력의 첫날, 즉 622년 7월 16일부터 이슬람교의 기원(AH, Anno Hegirae)이 시작되었다.
   메디나에서의 정착 기반을 다지며, 마호메트 자신은 623년에 시리아로 가는 메카 대상들을 상대로 세 번에 걸친 ‘약탈’(ghazawat)을 주도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듬해 그는 자신이 예언자임을 인정받기 위하여 유태인들에게 양보하던 태도를 버린 뒤 “유태인들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슬람교의 아랍적인 성격을 특별히 주장하였다. 625년 메카의 세력을 강력하게 활성화시키고 있던 아부 수피안이 메디나의 오아시스로 쳐들어오자 마호메트와 그의 무슬림들은 이를 극복해 내는데 힘썼다. 627년에도 수피안이 이끄는 1만 명의 동맹군은 사막에서 하룻밤의 비바람을 만나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마호메트는 ‘메디나의 헌장’으로 알려져 보존되어 오는 한 문서에 나타난 합의 조항에 따르면, 여덟 아랍씨족들과 메카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을 합친 아홉 파의 집단들 사이에 전통적인 아랍혈통들의 한 동맹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는 이슬람교단의 예언자 일뿐만 아니라, 정치가로서의 긴 안목을 가진 지도자이며 군사 사령탑이기도 하였다. 자신의 국가의 확장을 위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기타 종족을 정복하고, 628년에는 메카로 진격하여 카바와 그 인근 몇몇 신당들 안에 있는 다신교(多神敎)의 우상들을 무너뜨렸다.
   추종자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 그는 부유한 메카인들로부터 대부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아라비아에서 군사적으로 막강해진 그는 동맹 맺기를 원하는 경우의 조건으로 무슬림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내세워 아라비아 전역의 통일을 이룩하고, 632년 3월(이슬람曆 10년) 메카신전을 순례하고 나서, 메디나에 돌아와 그해 6월 8일 열병으로 숨졌다. 그가 신으로부터 직접 오는 것이라고 믿었던 제자들과 관련되는 사건들은 650년째에 수집·기록되어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Koran)에 남겨졌다. (⇒) 이슬람교

3. 후퇴와 복귀 - 창조적 소수자

헬라스 사회의 성장의 제2기와 아테네

아테네 :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지 않았다, 스파르타처럼 인접국을 침략 그 주민을 노예화하지도 않았다. 스파르타왕 클레오 메네스 1세가(BC519 ~ 487) 아테네를 지배하에 두려는 흉계에 대한 맹렬한 항거를 하였다. 서구사회 성장의 2기에 있어서 이탈리아 2백여년간 - 13세기 중엽의 호엔 슈타우펜 왕가의 멸망에서 15세기 말 프랑스의 침입까지 - 알프스 이북 유럽의 소동이 그칠날 없는 봉건사회의 반 야만에 휩쓸리지 않고 거기서 물러나 있을 수 있었다.

서구사회

성장 2기 이탈리아 : 이탈리아 천재가 성취 - 건축, 조각, 회화, 문학, 기타 예술과 일반문화의 세력균형에 작용하는 정치적 력학 체계.

성장 3기 잉글랜드 : 서구사회에 직면한 문제는 농업위주의 귀족양식에서 공업위주 민주적 생활양식으로 전환되면서 도시국가 체제가 배제된 것이다.

 스위스, 네덜란드, 잉글랜드의 응전 → 영국식 해결(공업위주)

성장 4기 러시아 : 러시아 공산주의는 서구화의 가면을 쓴 광신도다. 2세기 전 피터대제가 러시아에 과하였던 서구화로부터 이탈.

 

 제4장 성장을 통한 분화

문명 성장과정의 공통점 : 挑戰 → (創造, 摸倣) → 應戰

문명 예술분야

 헬라스 문명 : 인생을 심미적 입장에서 관조하는 경향.

 인도 문명 : 인생을 종교적 입장에서 관조하는 경향.

 서구 문명 : 기계를 중시하는 경향(Penchant / 愛好) 

 ☞ 文明 : 바위를 기어 오르는 자에 비유, 기어 오르는 자 각각 같은 일에 종사. 인간 생활과 제도에 나타난 多樣性은 하나의 皮相的 表現이고 그 밑바닥에는 그 다양성을 損傷하지 않기 위한 숨어있는 統一이 있다는 사실을 看過한다면 우리는 "均衡感覺"을 잃어버릴 위험에 빠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