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연구1(토인비)
제2편 문명의 발생
제3장 逆境의 效能
안 좋은 환경 → 번창(繁脹) → 쇠퇴(衰頹) → 복귀(復歸)
예) 마야문명의 삼림화, 인도문명의 실론섬(황무지), 페트라와 팔미라의 페허, 태평양 이스트섬의 석상(폴리네시아 중심지 추측) 로마 캄파니아(말라리아 창궐), 카푸아지방(살기좋은 환경에 업적은 초라한 수준)
저수지의 제방
흐르는 물을 제방을 쌓아 모으고 농업용수로 활용하는 것을 저수지라고 말한다. 대부분 저수지의 뚝방 아래에는 농경지가 수로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구획되어 있고 인근에 마을 부락이 자리한다. 강우량의 증가로 저수지의 물이 한계점을 초과하게되면 제방에 누수가 생기고 심한경우 뚝이 무너지면 논밭이 유실되고 마을마져 페허로 변하게 된다. 세계국가도 이와 똑같은 현상을 겪게 된다. 국경선은 힘의 균형점에 그어지게 되고 평화를 유지하다, 영웅시대가 되면 점차 국경지대(limes)에 만족의 침입이 잦아지게 되면서 방어선이 뚫리고 세계국가의 방위력이 약해지는 시점에서 일거에 만족이 점령하게 되면서 국가는 붕괴되는 것이다.
북부 아라비아 사막
페트라(Petra) : 사해와 아카바만 중간에 고대도시.(사암에 굴을 뚫고 살았다)
페트라는 기원전 400년경에 아라비아반도에 정착한 유목민족 나바테아인의 종교적 중심지이자 수도였다. 페트라를 건설한 나바테아인들은 고대 사회에서 인기가 높았던 알로에 · 계피 · 유향 등을 남아라비아와 인도에서 지중해 지역으로 운반했고 기원전 4세기부터 전설적인 유향로(乳香路)의 북부를 장악할 정도로 그 세력이 컸다. 척박한 지역이었지만 물이 있는 장소를 알고 사막의 모래바람을 피하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해발 950미터에 위치한 은닉처 페트라는 그 주위로 높고 가파른 암벽들이 어두운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어서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에 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했다. 로마도 무력으로는 페트라(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를 정복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2세기 초 페트라의 로마 합병에 대해 학자들은 로마가 페트라를 정복한 게 아니라 페트라가 합병을 정략적으로 이용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바위 절벽을 깊게 파서 건설한 카즈네피라움은 그 화려함과 웅장함, 빼어난 예술성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 기념비적 건축물은 나바테아족이 최전성기를 누렸던 아레타스 3세의 재위 기간(기원전 84~56)에 만들어졌다>
팔미라(Palmyra) : 시리아와 이라크 중간에 위치한 사막이 있는 오아시스 도시.
지금의 시리아 힘스 주에 있었다. 팔미라라는 이름은 셈어가 사용되기 이전의 이름인 타드무르, 타드모르, 투드무르의 그리스어·라틴어 형태이다. 129년경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방문한 후 자유시(civitas libera)가 되었다.
카라칼라 황제 시대에 식민도시(colonia)의 지위를 얻어 세금이 면제된 후 3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227년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 파르티아인들을 몰아내고 사산 왕조가 들어서자 곧 팔미라의 교역로인 페르시아 만으로 가는 길이 폐쇄되었다. 270년 팔미라 군대가 아나톨리아(소아시아) 지역을 대부분 정복하자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272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 아나톨리아와 팔미라는 다시 로마에 종속되었다.
신화에서 시리아 문명의 개척자를 마술사에 비유한다. 그중 대표되는 인물이 모세(MOSES)다. 바위에서 생수를 솟아나게 하는 기적(奇跡)을 보이는 것은 사막지대에 오아시스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터 섬의 비밀
이스터 섬은 폴리네시아 문명의 하나로 발육이 정지된 문명이다. 이곳에는 크고작은 석상이 바다를 향해 서있다.
모아인의 석상은 무게가 90톤, 높이가 1 ~30미터되는 것이 전 지역에 600개 정도 분포되어 있다. 석상은 3.5미터에 20톤 가량되는 것이 가장 많고 큰것은 20미터에 90톤이 되는 것도 있다. 석상은 한 방향을 가르키고 있는데 석상에 사용된 돌은 라노리라크 화산에서 채취한 돌을 사용했다. 석상은 고도로 잘 다듬어져 있는데 현지인은 돌을 전혀 다룰줄 모른다. 또한 폴리네시아 군도에서 인근 섬까지는 가장 가까운 곳이 1천마일 떨어져 있어 항해술이 없던 당시로서는 외부사람이 이섬을 들어오는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스터 섬은 화전민의 벌목으로 토지가 황폐화되고 식량부족과 부족간 전쟁으로 쇠락해가던 중 19세기 폐루의 무역상이 섬에 들어와 1,000명의 주민을 납치 노예로 팔아 넘기면서 몰락했다. 타히티 섬에 선교를 목적으로 들어왔던 선교사가 노예로 끌려갔던 몇몇 사람을 해방, 섬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돌아온 주민이 천연두와 결핵을 섬 전체에 퍼트려 19세기 후반무렵에 섬 주민이 100명정도 남아 "이스트 섬"은 전설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모아인의 상은 죽은 왕을 기리는 석물로 추정되나 누가 어떻게 세운 것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로마의 평원
타운 힐 : 로마평원(리비우스) BC 59 ~ AC17, 라틴족과 볼사이족에 의해 사람이 많이 살 수 있는 경작지로 변모하였다가 다른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황무지로 변함. / 로마시대
오디세이와 출애굽기
안이한 생활의 유혹이 위험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성찬(盛饌)과 친절을 베푼 후 그 부하들을 돼지로 변하게 한 키르케 여신이나 로터스(Lotus)의 열매를 먹고 안일을 즐기는 자들에게 닥쳐올 미래는 암담함 뿐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할 때 제사장 모세에게 한 불평 중 노예로 살 때 배불리 먹던 "이집트의 고기 항아리"를 추억하며 고기를 배불리 먹여주든가 아니면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한다. 자유를 누릴 것이냐 아니면 노예가 되어 배부른 돼지로 살 것이냐?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