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43. 로마 ! 세계의 종언
이제 종말을 향하여 출발한다.
최후의 로마인(서기 395년 ~ 410년)
동서분리
- 테오도 시우스 황제의 병사
- 암브로 시우스의 양치기(조종)
- 테오도 시우스의 후계 → 스틸리코 장군에게 부탁
- 아르카 디우스(장남) -- 18세(치세 13년) ---------|
- 호노리우스(차남) -- 10세(치세 28년) ------------|선제의 아들(황궁 안에서만 생활)
로마인과 야만족
- 서기 5세기 야만족의 3부류
1) 야만족 2세(로마 시민권 소유) → 니케아 공회 3위 1체파(다수)
2) 용병(동맹 부족 관계 - 포이데라 투스) → 아리우스파 계, 기독교도 / 로마 제국내 거주지 제공,
월급여 제공
3) 분탕질 후 로마에 눌러 앉는 비 계르만계 야만족(훈족포함) → 이교도(공통점)
※ 망국 → 사회가 통제되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인 끝에 망국이라는 결말에 이르게 되었다.
스틸리코 장군
부 : 반달족, 모 : 로마인(농장주 딸) / 로마 사회 : 부계사회(어머니가 야만족이라해도 아버지가
로마인이면 로마인) 부 ; 기병대 출신 장수
본인(스틸리코) : 383년(23세) 페르시아와 불가침 협정 교섭위해 파견된 사절단에 끼여 있었음.
나이많은 고관 사절단 중 주도해 교섭 매듭) / 유연성, 의연함으로 교섭.
능력의 인정 : 황제 호위대장
황제의 조카딸 세레나와 혼(황족) → 파렌스
군사령관으로 승격(30대 파격적 인사)
궁 내부에서 반감품은 세력 - 에우 누코스(환관)
환관 : 남자는 질투 대상
질투는 자기보다 우월한 자에게 증오심을 품는다.
후견인
- 스틸리코 : 총사령관 (2명 중 1명)
- 야만족 : 황제를 넘볼수 없다는 테오도 시우스 판단.
4세기 제국의 본거지 / 밀라노
콘스탄티노 폴리스 : 재상 루피누스(제멋대로 권력 휘두름)
서고트족
서기 395년 서고트족의 움직임 -- 침공
- 로마 동맹군 참석(여)한 : 알라리크 지도자
- 서방은 스틸리코가 지켜 동방을 침공.
- 스틸리코와 알라리크는 서로 함께 군 복무를 한 사이
황제의 명령서
재상 : 루피누스의 농간(弄奸)
내용 - 스틸리코의 서방 병력만 데리고 귀한
테오도 시우스 황제가 동방서 데려간 병력
콘스탄티노 폴리스로 보낼 것
전쟁 출격 중지명령
- 귀환 : 열병식(콘스탄티노 폴리스)
서기 395년 11월27일
아르카 디우스 황제
루피누스(재상) : 병사 한무리가 루피누스에 돌진 암살
루피누스의 죽음 : 처벌된 병사 없음
그의 주변에 적이 많았다.
황후, 시종장(에우트로 피우스), 민중, 시종장, 에우수 코스(환관)가 모든일
수습
알라리크(서기 396년 봄)
야만족 : 그리스 북쪽에서 남쪽으로 훑으며 처내려와 마케도니아 분탕질후 아카이아 지방으로 들어가
아테네를 공략, 코린트를 함락, 엘레우시스도 약탈(신비의식 치르는 곳)
황제 아르카 디우스의 명 : 가이나스 장군에게 수도를 단단히 지켜라
서기 397년 봄
- 그리스 중남부 - 산악 지대를 떠나, 그리스 서해안 남 → 북으로 유린
- 스틸리코 : 군대가 움직임
로마군 : 전투력 최상 상태에서 신속히 처리
제국 5세기 무렵 군사력은 1/3 ~ 1/4로 감소
병력 1만 ~ 2만(1개 군단)
▷ 콘스탄티노 폴리스는 병력지원 안되는 상태, 알라리크 대 스틸리코 대결(승리)
알라리크 : 산악지대로 도망
콘스탄티노 폴리스 : 같은 야만족이라 적당히 싸웠다는 비난
- 스틸리코 " 국가의 적" 공논화 / 스틸리코는 정나미 떨어져 군대 이끌고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알라리크는 이 것이재기의 기회를 얻은 것
알라리크(서 고트족)
- 북서부 일대 : 만행
- 동로마 제국 : 고트족의 출몰 불안증
- 콘스탄티노 폴리스의 주도권
- 황제 : 아르카 디우스보다 황후 에우 독시아, 환관 에우트라 피우스 알라리크 제거 논의
로마 사령관 임명(알라리크)
- 일리리쿰 군 사령관 : 북 도나우강에서 남의 아드리아해 까지 방위선
처리에 대한 부작용
1) 동맹부족 협정 : 협박하면 로마도 굴복한다(선례)
2) 분할(동서)
콘스탄티노 폴리스 황궁의 장악한 인물(라틴계인 → 그리스계 로마인으로 바뀐 시점과 일치)
일리리쿰 - 오늘날 중 유럽의 남반부에 해당.
지중해가 내해였던 시대
- 로마 카르타고 격파 북 아프리카 패권을 광대한 기원전 2세기 경
- 무어인 : 상업, 베르베르인 : 유랑민(사막)
- 로마제국 : 피정복자와 공동 운명체{다민족,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 공생 = 필연
- 북 아프리카 : 말 생산지
마우루스 기병이 유명(루시우스 퀴에트스 - 트라야누스 황제 때 다키아 전쟁공훈)
- 공생관계 : 이점 없을 때는 반대방향으로 나가게 돼(500년간 유지됐던 공생관계)
- 하드리아 누스 : 기업의 총수같은 속주 관리 2세기 이후 자취 감춤
- 3세기 : 야만족의 대거침입, 기독교의 출현 → 가족개념 붕괴
- 4세기 : 가장이 가족 모두를 살피고 감독할 여유가 없어짐, 속주총독 - 줄 끊어진 연, 아프리카가
이현상이 두드러짐.
아프리카 반란
주교 -- 동로마 : 콘스탄티노 폴리스, 안티오키아
서로마 : 로마, 밀라노
종교 : 인간활동의 하나, 존경이나 경의나 숭배처럼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형의 감정도 유형의
형태로 바뀌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천주교,도나우스파간 대립갈등
무어인 길도 : 아프리카 담당 군사령관, 최고의 지위를 누리는 야망, 테오도 시우스의 사망(395년)으로
야망의 첫걸음 시작(황제)
북아프리카 : 밀라노 - 호이노리우스 황제(근) ;불신
콘스탄티노 폴리스 - 아르카 디우스 황제(원) ; 충성 맹세
둘째걸음 북아프리카 → 이탈리아 보내는 식량 금수조치(밀의 출항 금지)
서로마 제국에 대한 군량으로 공격
- 원로원에서 스틸리코, 길도를 공공의 적으로 결의 요구
갈리아, 히스파니아의 밀 다량으로 수입 만장일치로 의결 / 원로원
군 지휘 : 길도동생 " 마스케젤" 길도와 싸움에져 이탈리아 망명(2명의 아들까지 잃어)
종교적 대립으로 싸움
"도나투스파 타도, 길도에 대한 증오심 : 동생 "마르케젤"의 심정
열성파 카톨릭 신자 / 길도편 병사 중 카톨릭 신자 투항 {마르케젤 앞에서 길도 목 잘림}
농민에서 농노로
3세기 : 농민들 야만족의 거듭되는 약탈로 유민 / 경작지 포기(팔거나 버림), 성내 유입
도시 과밀화 현상
기독교 : 도시에서 급격히 확산(온상이 된 도시 과밀화)
4세기 : 4세기 전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직업 세습화를 제도화
▷ 지방인구의 감소악제
▷ 로마제국의 전쟁터 막을 수 없어
▷ 농민에게 평화, 안정을 준 것 아님(팍스 로마나가 아님)
5세기 : 4세기 후반이후 농민의 지방 "회기현상"
자작농 → 농노
약탈 : 야만족
수탈 : 로마관료(토지 임대료 10% → 25% ~30%, 50%)
자경단 조직 - 농장지켜
판매 - 농장주(원로원 이나 유력가)
징집 - 농장주가 처리(해결)
잃는 것 - 자유와 독립
장원 → 중세시대 귀족이나 사원의 출현 배경
생산하지 않는자의 수 증가
4세기 후반 ~ 5세기
- 생산자수의 감소(비 생산자 수의 증가)
- 비 생산자 : 군인, 관료에서 기독교회 관계자
국교 : 기독교" 성직자의 직무환경"
교회활동 경비지급
- 미사기도, 자선, 사회복지, 의료, 교육
원수정 시대 : 국가 지방자치 단체, 유복한 개인, 사회복지 분담
의료, 교육 - 민간에 맏김(속주민 : 로마 시민권 부여, 속주세 면제)
제국의 쇠퇴 - 공과사의 절묘한 조합 붕괴
공공심의 쇠퇴
4대 비 생산자 계층의 마지막 : 원로원 계급
막대한 수입 : 개인의 사치, 호화로운 구경거리 제공에 사용.
북방의 야만족 남하 - 훈족 침략
서고트족의 남하 - 카톨릭파의 광신을 피하기 위함
알라리크의 북 이탈리아 침공
405년 대규모 야만족 침입
- 서기 260년 : 현직 황제 "페르시아"포로
- 게르마니아 방벽 - 제국 안보의 중요한 역할 / 티베리우스(초기화) - 도미티아 누스(본격화)
☞ 오랑케로 오랑케를 무찌르다(以夷制夷)
408년 봄 서고트족과 동맹 공개(알라리크)
- 원로원에 요청(승인)
- 조건 : 금괴(4천 리브라)지급 / 약 1500kg
로마인의 절반 - 야만족(부계) / 스틸리코도 아버지가야만족이라 배척됨
스틸리코의 국가적 처리내용(8개월 후 발표)
1. 동로마와 서로마의 관계악화
2. 야만족과 은밀한 결탁
3. 아들을 제위에 앉히려는 죄.
알라리크 / 로마 18개 성문 봉쇄, 로마시내 금과 은 요구(원로원 4천 리브라지불제의)
지불 협상 : 금 5천 리브라(1,875kg)
은 3만 리브라(11,250kg), 비단가운 - 4천벌, 고급천 - 3천필,
향신료 - 3천 리브라(1,125kg), 게르만 피 노예 해방
로마를 떠나지 않고 "토스카 지방에서 월동
서기 409년 알라리크 로마 정착 선언
요구사항 1. 서로마 제국 군 사령관 임명
2. 병사(알라리크) 로마군 종사
3. 정착지 할양
4. 이탈리아 북부에서 도나우강에 이르는 전략 요충지 알라리크 관할하에 둘 것.
협상 거부 : 올림 피우스
황제 호노리우스 : 라벤나에서 콘스탄티 노플로 도망하려하자 신하 반대
훈족을 용병으로 쓰자 제의 / 광란 상태에서황제는 올림 피우스를 사형
서기 409년 여름 2번째 봉쇄(로마 외항 오스티아 점거)
- 밀 수입항(이집트, 북 아프리카)
- 로마 목조르기 성문봉쇄보다 쉬워
- 오스티아 항 관리 관청 장관 아탈루스 병사로부터 로마황제 임명 / 실패(호노리우스에게 보냄)
서기 410년 8월24일 새벽 / 로마의 겁탈(5일간)
- 내통자 통해 북쪽 성문 통해 진입
- 기원전 753년 로마 건국
약탈의 방침(알라리크)
1. 저항 않는자 죽이지 말 것
2. 기독교회는 손대지 말 것
☞ 로마인 누구나 금괴 가지고 있다고 믿음 / 고문, 수녀,여자 - 능욕
북 아프리카 주교 아우구스 티누스 - 그의 저서에서 신의 나라에서 강제로 동의 없이 맺은 성
관계는 죄가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알라리크 사망 : 50세(410년)전후 급작스레 사망
후계자 아타울프 남하(이탈리아)도중 유턴 남 프랑스로 돌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