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11. 승자의 혼미(2)
제 2장 마리우스와 슐라 시대 / 기원전 120년 ~ 78년
가이우스 마리우스 : 미천한 가문 출신
로마 시민의 이름 : {개인 이름(프라이 노멘) / 일족이름(노멘) / 가문이름(코그노멘)}
EX) 티베리우스(개인이름)샘 프로니우스(일족이름)그라쿠스(가문이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가이우스 마리우스 - 40세 넘어서 율리우스 일족에 합류, 카이사르 가문의 여인
누미디아와 로마의 관계
스키피오 아이밀라누스 관계(파트로 네스와 클리엔 테스관계)
BC 118년 - 파이프 라인 끊어져.
BC 105년
- 독일과 덴마크(北夷) 남하 - 효과적 방어 실패 / 로마군단의 질적 저하(양적 감소 및 지휘관급 인재 부족)
- 가이우스 마리우스 (BC 107년 징병제→지원제) / 개혁은 시대적 요청에 따른 필연적 귀결.
군제 개혁
1)신속성(迅速性) / 총사령관의 지휘할 수 있는 군단 수
2)방어(防禦) → 공격형(攻擊型) 轉換
3) 병사의 분류(재산정도에 따른)방법 개선
4) 로마시민군과 동맹군의 구별 폐지
5) 막료선출 개선( 민회 → 총 사령관)
6) 병사들 간 무기(중무장, 경무장)구별 폐지 / 투창, 방패, 칼로 통일
7) 재산 계급(벨리테스, 하스탈리, 프린키페스, 트리알리) 깃발 → 은빛 독수리 깃발로 통일
8) 기병(騎兵) - 누 미디아
에스파냐
갈리아
그리스 출신의 말 잘타는 자
9) 총사령관의 직속 근위대( 로마 동맹시 참가병 → 군단 전체에서 선발)
지원제 변화(支援制 變化)
1) 실업자 흡수
2) 병사 장기 근무화(私兵化) /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같은 인물의 등장 토대가 됨.
- 원로원 반대 없음
- 마리우스 - BC104년 이후 매년 5회 연속(連續)
BC 103년 로마군단 출정
북이의 토벌 → 게르만족
론강에서 운하건설 작업(병사들의 전력 향상목적)
게르만족의 대 이동(30만)
- 테우토니족 : 남프랑스(바다) → 서쪽에서 이탈리아
- 킴브리족 : 알프스(넘어) → 북쪽에서 이탈리아
- 티그리니족 : 알프스(넘어) 동쪽에서 이탈리아
마리우스 - 테우토니족(서)
카툴루스 - 킴브리족(북) 적과 맞서 싸워
마리우스
- 적의 후방공격, 아쿠아이 섹스티아 전투에서 게르만족 10만명 전사
카툴루스(술라 - 참모참여)
- 전면전(前面) / 게르만족의 신장 등에 주눅 싸움 하기전 도망
BC101 년마리우스& 카툴루스 연합군
베르첼리(토리노와 밀라노 중간) 평원에서 전투
- 12만의 게르만족 사망(6만명 포로)
BC100년
마리우스 집정관 연속 6회 선출(지방출신 신참자의 출세는 명문귀족도 달성못한 지위와 영예로 빛났다.
직업군인의 '평화' 실업
퇴직군인 - 실업수당, 일자리 알선
호민관 '사트르니 누스'←호민관(BC99)재선 경쟁자 하수인 시켜 살해 로마 원로원 최종권고 의결
- 서민의 지급하는 곡물가
밀갑의 조정 : 1모디우스당 6.5 아세아(1모디우스당 5/6아세아 인하)/무료배급에 가까운 값(실업수당 효과)
BC90년
식민시의 반란 전쟁
캄파니아 중심 / 북 : 프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프스
남 :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율리우스 시민권법 - 로마 시민권법 전면 수용(로마의 국가 방향 전환)
1) 동맹전쟁의 종결
2) BC367년 리키니우스 법(귀족과 평민 공직취임 기회균등법)과 맞먹는 로마 국가의 방향전환
주권재민 : 閉鎖性을 통해 異質的 分子를 排除하는 方法으로 유지.
완전평등 : 이질적 분자 구병불가
覇權國이 된 後 로마의 市民權 > 影響力 大
◎ 同盟國 → 로마국가의 지방자치 단체로 바뀜
동맹국에 대한 관계
1) 파트로 네스 ↔ 클리엔 테스(누미디아)관계(속국)
미트라다 테스와 전쟁
'동맹시' 전쟁 - 승자 '술라' 집정관 선출
마리우스의 오리엔트 정벌 야심(술라에게 맞기고 싶지않은 욕심) , 루프스와 연합
BC88년 호민관 -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프스
로마 시민(구) - 35개 선거구 중 일부를 신 시민에(8개)부여/해방노예 ; 4개선거구→ 신시민의 뜻 작게 반영
호민관 술피키우스 → 35개 선거구 어디서든 투표(안) 통과 /술피키우스 법
☞ 술피키우스 법안 통과로 로마시민(신.구) 亂鬪劇 / 집정관 술라 봉변
술라의 恥辱 回腹을 위한 사병동원 / 로마진격(무력으로 로마 제압한 사례)
- 마리우스 : 에투루리아 도망
- 술피 키우스 : 효수(梟首)
BC87년 집정관
옥타비우스, 킨나(40대) 當選 / 카피톨리노 언덕에 불러 최고신 유피테르 신전 안에서 '술라 성립시킨 법안' 지키겠다고 盟誓하게 함.
BC87년 킨나 : 민회소집 / 마리우스 명예회복, 신시민 '술피키우스'법 부활(復活)
옥타비아 누스 / 킨나의견 거부권 행사, 무력충돌, 킨나패배 도주
Africa에서 마리우스 6천 병사 이끌고 로마로 진군 → 怨恨 ☜ 옥타비우스 살해
5일동안 원로원 50명, 기사계급(경제인) 1,000명 살육
BC86년 집정관
- 마리우스 : 임기시작 13일째(1월13일) 사망
- 킨나 - 독재(獨裁政治 始作)
기사계급 : 金融政策에 등돌림(빌려준돈 1/4 돌려받는 것)
- 술라 : 그리스 폰투스군과 전투
전사자 : 10만 이상(도망 1만) / 로마군 :12명 전사
핌브리아 병사 1만5천 → 술라쪽 진영으로 집단탈주
핌브리아 - 페르가몬의 제우스 신전에 가서 자결
소아시아에서 질서 회복 : 분쟁국(폰투스,비티니아, 카파도키아)상호 불가침 조약 체결.
- 킨나 딸과 율리우스 카이사르 결혼(16세)
- 킨나 / 안코나에서 군단 소집 술라와 맞서 싸우기 위함.
- 술라 : 보수파( 3만5천 고참병, 메텔루스 피우스 2개군단, 폼페이우스 3개군단) 7만5천명.
술라의 살육 : 반대파 제거, 노예 해방군(1만) 행동대원으로 삼음
☞살생부(4천 칠백명) / 마리우스 ; 유해 파헤쳐 테베레 강에 버려짐, 80명의 원로원 의원,1천6백명 기사
沒收財産을 경매 통해 사들인 크라수스 떼부자 됨(훗날 3두정치의 한머리가 됨)
살생부(殺生簿)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18세) ← ↑
마리우스 처 조카 / 킨나의 사위
킨나의 딸과 이혼하면 살려주겠다는 술라 제의에 거부의사밝힌 뒤 쫒김
술라의 정책 ☜ 共和政으로 回歸
- 실업자 대책 : 군 퇴직자 식민시 거주
- 원로원 개혁 : 300명 → 600명(경제인<기사계급>끌어들임)
- 사법개혁 : 배심원(그라쿠스 형제 이전으로 돌림 / 원로원 강화)
◎ 독재관에서 자진 사퇴, 정계에서 은퇴 나폴리 서쪽 바닷가 쿠마(이탈리아 반도내 그리스 식민지)
술라 죽음 : 토혈(吐血) 후 사망, 자식의 장래를 루굴루스에 부탁, 국장, 화장(코르넬리우스가문 매장전통임에도 불구 뒷날 걱정) ☆ 묘지명 : 동지에게는 술라보다 더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없고, 적에게는 술라보다 더 나쁜일을 한 사람도 없다.
제 3장 폼페이우스 시대 / BC78년 ~ BC63년
- 자신의 야망을 실현 후 죽음 맞아 행복(幸福)
-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굴루스 : 술라가 이탈리아로 돌아갈 때 소아시아 뒷일 부탁 유언 집행인 지명
- 카이사르 : 플레이 보이(반 술라파 인물) ☜ 흥선 대원군과 비슷한 이미지.(자신의 야망을 여인의 치맛폭 속에 숨긴 인물)
- 마루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36세) :루글루스와 동연배, 몰수재산 경매로 큰 이익을 남긴자.
- 폼페이우스 : 아프리카로 달아났던 민중파 소탕공(개선식), 술라 - 농담으로 마그누스(Magnus - the great(영) 의미)술라가 죽고난 후 서명에 사용.
BC77년
남프랑스 속주 총독"레피두스"
부결되었던 법안(군사력으로 실현)
1. 술라에게 숙청되었던 희생자로 몰수토지 원래주인에게 돌려준다.
2. 술라에 의해 국외 추방된자 불러들인다.
3. 빈민층에 대한 복지정책`곡물법의 부활
4. 호민관의 권위와 권한의 부활
이탈리아 중부 에투루리아(오늘날 투스카나 지방)에서 전투 - 폼페이우스 勝
레피두스 - 샤르데냐 섬에서 병사, 부장 부르터스 처형(훗날 카이사르 암살자 브루투스 7세때)
세르토리우스 - 에스파냐에서 세력화, 레피두스 잔당(殘黨)
29세 폼페이우스 지원
자격 - 연공서열(안찰관(회계 감사관) → 법무관 → 집정관
실력주의
집정관 대리 → 29세 폼페이우스
세르토리우스 전쟁(BC80 ~ BC72년까지 8년)
- 에스파냐인 - 제2의의 한니발(한쪽눈 실명)
- 세르토리우스 - 내분(주색) / 페르페르나가 暗殺
BC 72년
메텔루스 피우스, 폼페이우스 전쟁의 승리를 보고
로마 원로원 - BC 73S년 대규모 노예반란(스파르타 쿠스 반란) / 검투사 봉기
JS C - 인간은 신앞에 평등 신을 믿지않는 자에 대하여는 평등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노예제도에 대한 기독교의 견해, 노예제도를 완전 폐지하지 않음, 단 기독교도들의 노예화를 금했을 뿐
메텔루스 피우스 - 술라가 정한 법에 따라 로마가 정한 루비콘 강에 왔을 때 군단을 해산했다.
폼페이우스 -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 교외에 숙영
1) 폼페이우스 휘하에서 싸운 병사들에게 토지를 줄것
2) 개선식 거행 허가
3) BC70년(내년) 집정관 출마하는 것을 인정할 것
크라수스 - 철(鐵)
술라(민중파 숙청 때 경매로)
화재 - 집을 싸개 사는 수법
집정관에 대한 욕심 → 인망부재
폼페이우스의 병사표 나눠주는 것 - 폼페이우스
BC70년 개정법
1. 호민관 권위와 권력의 완전부활(BC287년 호르덴 시우스법 부활)
2. 배심원(陪審員) 제도의 개혁
BC13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원로원, 기사계급1/2)실패
BC122년 가이우스 그라쿠스(기사계급 독점) → BC82년 술라는 이법을 원점으로 돌림
BC70년 폼페이우스(평민), 크라수스 (기사)이익대변, 원로원 각1/3배분
술라 → 귀족에 이로운 정책
폼페이우스 → 민중(矜持, 希望)
1차 미트라다 테스 전쟁 - 술라
2차 미트라다 테스 전쟁 - 루쿨루스
푸블리 카누스(세무대행) - 금융업(흉년 고리대금)
루쿨루스의 금융개혁 ☜ 금융업자 적으로 돌아서
1. 푸블리 카누스들(세무 대행업자)에게 주는 이자는 한달에 1%로 한다.(연율12%)
2. 대금업자의 받아야할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재무자 1년 수입의 1/4이상 지불요구 불가.
3. 속주민 생활의 회복(민심회복)
루굴루스 : 여인에 대한 福과 부하 運은 없었다.
미식가로 정평, 식사하는 방의 粧飾 → 식사 중 연주되는 음악, 낭독되는 시, 식탁에서 오가는 대화, 거기에 적합한 손님 이 모든 것의 조화로운 총합이 루쿨루스식 식사.(1회 식사비용이 5만 드라크마 소요/ 평민 1년 수입이 5천 드라크마)
병사들의 종군거부 : 알랙산드로스 대왕이후 최초 소아시아 → 카스피해 까지 진군.(계획)
- 병사와 소통 부재(술과 고기로 위로하는 것 못함), 전리품 분배 불만족(은화;병사,공예품;로마, 금화;자기)
시리아 셀레 우코스 왕조의 쇠락
- 해적의 극성 - 배후 (미트라다 테스왕)
▷ 호민관 가비니우스 해적소탕 작전
1. 12만 중무장 보병과 5천 기병 구성된 20개 군단투입
2. 원로원 의원 14명 막료 참여
3. 군선 500척 투입
4. 총사령관 지휘권 - 지중해 전역 (해안 80KM 내륙)
5. 작전금 - 1억4천400만 세르텔리아(로마국가 예산 2억 세르텔리아)
6. 총사령관 폼페이우스(39세)
7. 기간 3년
폼페이우스의 작전
13개 작전해역
해상권 → 육지(추적)潰滅
에스파냐 근해, 시칠리아, 사르데냐, 엘바섬, 티테니아 해 제압(40일) / 지중해 서부
북쪽 - 에게해
남쪽 - 이집트
동쪽 - 시리아, 팔레스티나, 소아시아 킬리키아(본부) / 어망 당기듯 (49일)
해적 - 1만명 사망
2만명 포로
3년중 3개월 소비한 폼페이우스 소아시아(미트라다 테스 전쟁에 루쿨루스와 교대)
BC66년 오리엔트 작전
제 3차 미트라타 테스 공격
흑해 연안의 폰투스 왕국으로 진격(40세 폼페이우스)
옥시덴트(서방)동맹 - 약자 편들어 강대국 대항
오리엔트(동방)동맹 - 강자 편에 빌붙어 약소국 쓰러트리는 것
파르티아(BC 247 ~ AD226) - 아르 사케스가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독립 카스피해(남동지방)본거지로 한때 번성하였으나 오랜세월 전투로 사산왕조에 멸망.
파르티아가 로마에 붙고 아르메니아(국왕 - 티그라네스)내 분열(分裂)
폰투스 (서쪽), 아르메니아 (남쪽)가 세력확장을 목적으로 연합
미트라다 테스의 음독
아들 파르나케스가 폼페이우스에게 보내와 폰투스 왕국의 역대왕 묘역에 장사지내도록 함.